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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4대문 이야기 (숭례문/홍인지문/돈의문/숙정문)
15-10-02 16:09
 
 
 


한양도성의 성문은 총 8개로, 성곽의 동서남북에 각각 대문을 짓고, 대문의 사이사이 통행이 편리하라고 문을 하나씩 더 지었습니다. 4대문과 4소문을 통해 도성과 전국 8도를 상징적으로 연결했으며, 유학에서 말하는 4대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에 맞추어 한글자씩 넣어 오행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자를 포함한 흥인지문, 의(義)는 서쪽을 상징해서 돈의문(서대문), 예(禮)는 남쪽을 상징해서 숭례문(남대문), 북쪽을 상징하는 지(智)는 의미가 상통하는 정(靖)으로 대체해서 숙정문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또 마지막 덕목인 신(信)은 방위상 중앙에 해당하므로 도성의 중심에 위치한 종각의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출처: http://myknight86.blog.me)

대한민국 국보 1호이며 한양도성의 여덟 문 중에서 제일 웅장하고 큰 규모의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남쪽문이자 정문의 역할을 했던 문으로 당시 한양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의 대상이었으며, 지방 사람들에게는 한 번 보고 가면 큰 자랑거리가 되는 문이었습니다. 

숭례문은 한양 성곽과 함께 1396년에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후 몇 차례 수리를 거치게 되는데 그 중 세종 29년에 실시된 대규모 중수가 대표적입니다. 당시의 중수는 숭례문이의 주변 지대가 낮아서 정문으로서 품위가 없을뿐더러 남쪽 목멱산(남산)과 서쪽 인왕산을 연결하는 이곳의 지대를 높여 경복궁이 아늑한 지세 안에 있게 하자는 풍수지리상의 이유에서 시작된 중수는 기존 성문을 완전히 헐어낸 다음 흙을 쌓아 지대를 높이고 인왕산과 남산 산맥을 연결하는 등 거의 새로 지은거나 다름 없었다고 합니다.

숭례문은 임진왜란, 한국전쟁을 비롯한 크고 작은 난리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오다 일제 때에 이르러 문의 양끝으로 이어져 있던 성곽이 허물어지고 그 옆으로 전차와 차들이 다니게 되면서 600년 조선 왕조의 정문 역할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달리는 차들과 높은 빌딩에 둘러싸여 외딴 섬처럼 외롭게 서 있던 숭례문은 2008년 2월 방화사고로 인해 소실되었고, 한 순간에 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고가 있은 후 시작된 복원공사는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우리의 곁에 다시 돌아왔으며, 복원을 통해 일제 때 잘려버린 좌우측 성곽을 복구하는 등 조선 시대 당시 모습에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숭례문 명판은 세로!]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달려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유교의 인, 의, 예, 지 중에서 예(禮)는 오행사상의 화(火), 즉 불에 해당하기 때문에 불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현판을 세워 달았다고 합니다. 또 현판의 글씨는 명필로 유명한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 태조 5년 창건, 단종 원년에 고쳐 지었고,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에 성문의 대부분을 교체하고 목재 역시 새것으로 교체하며 새로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흥인지문 문루는 역시 이 때 새로 지은 목조건물 이라고 하네요!

도성의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쌓은 이유는 지형이 낮고 평탄해서 외침을 방어하기에는 부족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짐작되며,  편액은 오행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태조 5년 1396년 9월 24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흥인문'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가 풍수지리상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용을 닮은 글자인 之를 이름에 넣어서 4글자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899년 전차가 등장했을 때 전차는 흥인지문의 홍예 안으로 다녀 성문과 성곽이 보존되었으나 전차가 복선화되면서 1908년  좌우의 성곽이 헐려나갔고 1910년에는 북쪽으로 도로와 전차노선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방으로 차들이 다녀 접근이 불가능해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흥인지문 주변 도로 일부를 쉼터로 만들어 동대문 이대병원 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삼면을 근거리에서 관람할 수 있게 되었으며 흥인지문에서 동대문교회 쪽으로 오르면 낙산으로 오르는 서울성곽 길로 이어집니다.


[흥인지문 옹성 이야기]

또 흥인지문의 특징은 외침에 방어하기 위해 성으로 문을 빙 둘러 쌓은 옹성이라는 것! 하지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은 것이 무색하게 정작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가장 먼저, 쉽게 입성했던 곳이 바로 흥인지문이라는 슬픈 전설이... 







조선시대 서쪽에 있던 대문인 돈의문. 돈의문은 의(義)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돈의문은 태종 13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폐쇄되었고, 돈의문 남쪽 인덕궁 앞에에 서전문이 세워져 사용되다가 다시 세종 4년, 도성정비공사를 하며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전쟁으로 소실된 후 숙종 37년에 다시 재건되기에 이릅니다. 

19세기 후반까지 잘 보존되던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경성도시계발계획에 따른 전차 궤도 복선화로 성문과 성곽이 강제철거되었고 경매를 통해 민간에 판매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종로구 신문로 2가 정동 사거리가 바로 돈의문 터로 현재는 공공미술 작품인 <보이지 않는 문(안규철 작)>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돈의문과 경매]

1915년 일제의 전차 궤도 복선화로 성문을 철거, 경매에 붙여진 돈의문! 돈의문의 경매 낙찰가는 단돈 205원으로 당시 쌀 17가마 가격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경매 낙찰자가 성문을 헐어보니 온갖 보물이 나와 횡재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출처: http://blog.daum.net/2006jk/17219586)


숙정문은 도성의 북쪽 대문으로 태조5년에 세워졌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이후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름이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숙정문은 도성의 북문으로 격식에 맞춰 짓다보니 산 속에 문만 있고 길은 없는 형식적인 문이었고,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좌우 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열어두면 지력이 약해진다는 이유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상소를 올려 결국 태종 13년 숙정문은 폐쇄되었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음양오행 중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를 위해 문을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합니다 .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으로,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되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의 데이트 코스 숙정문]

한 숙정문을 열어두면 음기가 들어온다는 설이 있는데, 정월대보름 전에 숙정문을 세번 다녀오면 그해 액운이 물러간다는 믿음에 도성 부녀자들 사이에 숙정문 나들이가 유행했고, 덩달에 남자들도 몰려들었고, 숭정문 밖 뽕나무밭이 은밀한 데이트장소가 되어 상중하간지풍(桑中下間之風)이라고 하여 부녀자를 풍기문란하게 만드는 바람이 불어온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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