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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석(滿花席),화문석,만화방석(滿花方席),용수초지석·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용문염석(龍紋簾席)·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만화석(滿花席)·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채화석(彩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황화석(黃花席)·화석(花席)

    만화석(滿花席)은 화문석의 다른이름이기도한데 여러 가지 꽃무늬를 가득하게 놓아서 짠 돗자리인데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24년 6월 29일자에 명나라에 예물로 만화방석(滿花方席)이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왕골은 재배가 손쉽고 이를 매는 일도 까다롭지 않아서 이것이 자라는 곳에서는 거의 누구나 짤 수 있다. 그리고 겉이 매끄럽고 기름져서 물이 잘 스미지 않고 매우 부드럽다.여름철에 화문석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눕거나 앉으면 더위를 덜 수 있어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무늬 또한 아름다워 집 치장에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더구나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여왔던 우리에게 화문석은 빼놓을 수 없는 살림살이의 하나였으며, 이것이 일찍부터 중요 공산품으로 손꼽혀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시대에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에 석전(席典)으로 불리던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가지 이름으로 미루어,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이러한 사실은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같은 책에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벼슬아치도 수레 앞뒤에 휘장 삼아 ‘완석(莞席)’을 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을 화문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고려에 들어와 화문석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 내지 선사품이 되었다. 고려초에 요나라에 보낸 특산품 가운데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龍鬚草地席)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탐내었다고 한다. 북송(北宋)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는 극찬을 늘어놓았다.화문석의 수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열은 더욱 높아졌다. ≪통문관지 通文館志≫에 따르면 한 번의 동지사행(冬至使行) 때 중국에 보낸 화문석이 124장에 달하였으며, 우리 나라에 오는 관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양을 선사하였다.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기관은 장흥고(長興庫)로서,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들였다.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용문염석(龍紋簾席)·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만화석(滿花席)·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채화석(彩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황화석(黃花席)·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용수초지석이라는 이름은 왕골이 용의 수염처럼 생긴 데에서 왔다. 그리고 오채용문석·용문염석·오조용석은 용모양의 무늬를 넣어 짠 데서 왔다. 오채용문석은 다섯 가지 색으로 짠 용무늬 꽃자리이고, 오조용문석은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 꽃자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극상품이어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왕실에서 중국에 보내는 선물용으로 생산되었다. 용문염석은 용무늬 발로서 역시 궁중에서 썼으리라고 짐작된다. 조선에서는 왕골 생산지로 안동의 예안을 손꼽았다.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영남의 안동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친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에서는 해서·배천·연안의 것을 제일로 쳤으며, 경기 교동(喬桐 : 강화도 서북쪽 섬) 것은 버금간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강화도 화문석은 근래에 널리 알려진 듯하다. 왕골은 사초과에 딸린 일년생풀로서 줄기는 세모꼴이며 줄기 꼭지에서 꽃이 나와서 잔 꽃이 핀다. 4월 중순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5㎝쯤 자라면 5월 초순에 옮겨 심었다가 8월 상순부터 9월 사이에 거두며 길이는 1.5∼2m에 이른다. 줄기의 섬유 조직은 매끄러우며 윤택이 나는데 다 자라면 누른빛으로 변한다. 거두어들인 왕골은 줄기의 각에 찬이슬을 맞혀가며 3∼4일 동안 바짝 말린다. 이렇게 하여야 빛이 하얗게 바래서 윤기가 난다.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로서(길이 30∼50㎝)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낸다. 겉껍질이라야 염료가 적게 들고 물감이 곱게 먹는다. 물든 왕골은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물감으로는 회색·검은색·붉은색·누른색·진황색·자색·남색·녹두색·반물 등 아홉 가지를 쓴다. 왕골은 자리틀에 올리기 전에 물에 적셔둔다. 물기가 있으면 부드러워서 매기 쉬운 반면 마른 것은 갈라지거나 부서지며 잘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문석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짜게 마련이어서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며 다만 무늬에 다양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것을 매는 사람 수는 너비에 따라 달라서 석 자에서 다섯 자 크기에는 두 사람, 여섯 자에서 일곱 자 크기에는 세 사람, 여덟 자에서 아홉 자 크기에는 네 사람, 열 자에서 열두 자 크기에는 여섯 사람이 한 동아리가 된다. 세 사람이 너비 예닐곱 자의 화문석 한 장을 짜는 데에는 닷새쯤 걸린다. 초보자는 2년쯤 배우면 기술을 익힐 수 있다. 흔히 화문석과 등메를 혼동하나 등메는 한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이다. 재료 또한 달라서 등메에 드는 참골은 줄기가 둥글고 가늘다. 예로부터 화문석보다 등메를 윗길로 쳤다. 진상품관련근거만화석(滿花席)은 경상도(순흥(영주),영천,예천,의성,풍기)에서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있다 참고문헌인간문화재』(이용해, 어문각, 1963), 한국민속대관』 5(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여지도서, 세종실록지리지  

  • 보성용문석(寶城 龍紋席), 강화 화문석(江華 花紋席)

    보성 용문석(寶城 龍紋席), 강화 화문석(江華 花紋席) 보성 용문석은 400여년간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작업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취급되었고 근래에는 선물용으로 주문 생산되고 있다. 마을 특산물인 용문석. 왕골로 만든 돗자리로 용 문양이 있다고 하여 용문석이라 부르는데 옛날에는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용문석을 만들어왔으나 주거생활문화가 바뀌고 소득이 보장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용문석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마을의 임애경 선생만이 노동부로부터 기승전승자로 지정되어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용문석에는 여의주를 가운데 둔 청룡과 황룡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길이 192cm * 122cm 크기의 용문석을 만들려면 하루 4시간 이상씩 꼬박 보름을 일해야 할 정도로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이렇게 만든 용문석은 80만원 정도에 팔리는데 공임 외에도 주재료인 왕골 재료비가 적잖게 들어가 큰 수익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용문석 기승전승자 : 임애경 생산자 :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 삼정마을 대표자: 임 애 경 문의전화 : 061-857-9880   이제는 더 이상 자리를 매는 곳도 없고 카펫이나 나일론 돗자리에 밀려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전원생활에 대한 기대가 늘어나고 웰빙을 말하는 지금 천연재료로 엮은 자리나 돗자리를 하나쯤 장만해 보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신라시대 때부터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에 석전(席典)으로 불리던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가지 이름으로 미루어,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같은 책에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벼슬아치도 수레 앞뒤에 휘장 삼아 ‘완석(莞席)’을 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을 화문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에 들어와 화문석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 내지 선사품이 되었다. 고려 초에 요나라에 보낸 특산품 가운데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龍鬚草地席)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탐내었다고 한다. 북송(北宋)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는 극찬을 하였다.   화문석의 수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열은 더욱 높아졌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한 번의 동지사행(冬至使行) 때 중국에 보낸 화문석이 124장에 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오는 관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양을 선사하였다.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기관은 장흥고(長興庫)로서,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들였다.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 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 용문염석(龍紋簾席),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만화석(滿花席), 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 채화석(彩花席), 잡채화석(雜彩花席), 황화석(黃花席), 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용수초지석이라는 이름은 왕골이 용의 수염처럼 생긴 데에서 왔다. 그리고 오채용문석, 용문염석, 오조용석은 용모양의 무늬를 넣어 짠 데서 왔다. 오채용문석은 다섯 가지 색으로 짠 용무늬 꽃자리이고, 오조용문석은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 꽃자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극상품이어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왕실에서 중국에 보내는 선물용으로 생산되었다. 용문염석은 용무늬 발로서 역시 궁중에서 썼으리라고 짐작된다.   진상품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따르면 채화석(彩花席), 황룡화석(黃龍花席), 왕골(莞草), 초석(草席), 별문상석(別紋上席), 소룡화석(小龍花席), 연화방석(連花方席), 잡채화석(雜彩花席) 등이 경상도 안동, 전라도 보성 등지에서 진상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화문석의 재료 조선에서는 왕골 생산지로 안동의 예안을 손꼽았다.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영남의 안동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친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에서는 해서, 배천, 연안의 것을 제일로 쳤으며, 경기 교동(喬桐 : 강화도 서북쪽 섬) 것은 버금간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강화도 화문석은 근래에 널리 알려진 듯하다.   왕골은 사초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서 줄기는 세모꼴이며 줄기 꼭지에서 꽃이 나와서 잔 꽃이 피며 1.2∼1.5m로 자라며, 줄기의 단면은 사각형을 이룬다.. 4월 중순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5㎝쯤 자라면 5월 초순에 옮겨 심었다가 8월 상순부터 9월 사이에 거두며 길이는 1.5∼2m에 이른다.   줄기의 섬유 조직은 매끄러우며 윤택이 나고. 매우 질기며 다 자라면 누른빛으로 변한다. 거두어들인 왕골은 줄기의 각에 찬이슬을 맞혀가며 3∼4일 동안 바짝 말린다. 이렇게 하여야 빛이 하얗게 바래서 윤기가 난다.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로서(길이 30∼50㎝)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낸다. 겉껍질이라야 염료가 적게 들고 물감이 곱게 먹는다. 물든 왕골은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물감으로는 회색•검은색•붉은색•누른색•진황색•자색•남색•녹두색•반물 등 아홉 가지를 쓴다. 왕골은 자리틀에 올리기 전에 물에 적셔둔다. 물기가 있으면 부드러워서 매기 쉬운 반면 마른 것은 갈라지거나 부서지며 잘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배수가 불량하고 유기물의 함량이 높아서 벼의 재배에 부적합한 저습답 또는 고래실에서 많이 재배된다. 왕골은 줄기를 피부(皮部)와 수부(髓部)로 분리하여 건조시킨다. 실 모양으로 가늘게 쪼개어 말린 것으로는 돗자리, 방석, 여름베개, 모자, 발 등을 만들고 질긴 왕골속으로는 둥구미를 만든다. 특히 보성의 용문석은 뒷면을 이것으로 덧댄다. 왕골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재배  미루어 되는 우리나라 특유의 공예작물로, 그 생산도 우리나라에 한정되어 있다.   골풀은 골풀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높이가 50∼100㎝ 정도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지에도 분포하는데, 돗자리 이외에 방석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돗자리는 거의 농가의 부업으로 영남, 호남 지방이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화문석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짜게 마련이어서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며 다만 무늬에 다양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것을 매는 사람 수는 너비에 따라 달라서 석 자에서 다섯 자 크기에는 두 사람, 여섯 자에서 일곱 자 크기에는 세 사람, 여덟 자에서 아홉 자 크기에는 네 사람, 열 자에서 열두 자 크기에는 여섯 사람이 한 동아리가 된다.   세 사람이 너비 예닐곱 자의 화문석 한 장을 짜는 데에는 닷새쯤 걸린다. 초보자는 2년쯤 배우면 기술을 익힐 수 있다. 흔히 화문석과 등메를 혼동하나 등메는 한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이다. 재료 또한 달라서 등메에 드는 참골은 줄기가 둥글고 가늘다. 예로부터 화문석보다 등메를 윗길로 쳤다.   화문석의 종류 화문석 꽃방석 화문석 꽃방석, 돗자리는 왕골에 물을 들여 손으로 덧 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를 말한다. 왕골은 재배가 손쉽고 이를 매는 일도 까다롭지 않아서 이것이 자라는 곳에서는 거의 누구나 짤 수 있다. 그리고 겉이 매끄럽고 기름져서 물이 잘 스미지 않고 매우 부드럽다.   여름철에 화문석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눕거나 앉으면 더위를 덜 수 있어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무늬 또한 아름다워 집치장에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더구나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여왔던 우리에게 화문석은 빼놓을 수 없는 살림살이의 하나였으며, 이것이 일찍부터 중요 공산품으로 손꼽혀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대청마루에 돗자리를 깔아놓은 모습으로 왕골이나 골풀의 줄기를 잘게 쪼개어 친 자리다. 삼국사기에 수레를 대발과 왕골(莞草)로 꾸몄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왕골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 별문석(別紋席), 호문석(虎紋席), 난초석(蘭草席)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용문석(龍紋席) 궁중에서 잔치를 여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돗자리의 일종이다. 특히 용문양을 수놓은 왕골 돗자리를 용문석이라 하는데, 전라남도 보성의 것이 유명하여 200년 전부터 궁중에 납품하였다. 용문석의 무늬는 가장자리에 ‘ㄹ’자 모양의 선을 두르고, 자리 중앙에 여의주를 넣은 다음 양편에는 청룡과 황룡이 마치 여의주를 다투듯 꼬리치는 모습을 수놓았다.   제조방법에 따른 분류 같은 왕골로 만들더라도 제조방법에 따라 돗자리와 자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즉, 돗자리는 가마니틀과 비슷한 돗틀에 미리 날을 걸어두고 골을 바늘대에 걸어 지르고 바디질을 하여 짠다. 자리는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장목에 늘어놓고 골을 대어 엮어나간다. 돗자리는 날이 속으로 감춰지고 자리는 날이 밖으로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자리에 속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인천광역시 강화에서 만드는 화문석(花紋席)이다.   참고문헌 및 출처 <복원모델의 국적과 시기> 조선시대(화문석에 궁궐 용문양 합성),[네이버 지식백과]용문석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대하소설),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화문석 [ 花紋席 ] ,사진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자료 / 문화컨텐츠닷컴,『한국의 민속공예』(맹인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9),[네이버 지식백과]돗자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민속문화대백과사전,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문석문화관',참조 / 여름에 시원한 '왕골자리' 매던 송전 장율마을

  • 강화화문석, 보성 용문석,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 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 용문염석(龍紋簾席), 오조용문석(…

      강화 화문석(江華 花紋席), 보성 용문석(寶城 龍紋席) 신라시대 때부터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에 석전(席典)으로 불리던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가지 이름으로 미루어,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같은 책에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벼슬아치도 수레 앞뒤에 휘장 삼아 ‘완석(莞席)’을 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을 화문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에 들어와 화문석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 내지 선사품이 되었다. 고려 초에 요나라에 보낸 특산품 가운데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龍鬚草地席)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탐내었다고 한다. 북송(北宋)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는 극찬을 하였다.   화문석의 수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열은 더욱 높아졌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한 번의 동지사행(冬至使行) 때 중국에 보낸 화문석이 124장에 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오는 관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양을 선사하였다.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기관은 장흥고(長興庫)로서,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들였다.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 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 용문염석(龍紋簾席),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만화석(滿花席), 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 채화석(彩花席), 잡채화석(雜彩花席), 황화석(黃花席), 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용수초지석이라는 이름은 왕골이 용의 수염처럼 생긴 데에서 왔다. 그리고 오채용문석, 용문염석, 오조용석은 용모양의 무늬를 넣어 짠 데서 왔다. 오채용문석은 다섯 가지 색으로 짠 용무늬 꽃자리이고, 오조용문석은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 꽃자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극상품이어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왕실에서 중국에 보내는 선물용으로 생산되었다. 용문염석은 용무늬 발로서 역시 궁중에서 썼으리라고 짐작된다.   진상품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따르면 채화석(彩花席), 황룡화석(黃龍花席), 왕골(莞草), 초석(草席), 별문상석(別紋上席), 소룡화석(小龍花席), 연화방석(連花方席), 잡채화석(雜彩花席) 등이 경상도 안동, 전라도 보성 등지에서 진상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화문석의 재료 조선에서는 왕골 생산지로 안동의 예안을 손꼽았다.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영남의 안동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친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에서는 해서, 배천, 연안의 것을 제일로 쳤으며, 경기 교동(喬桐 : 강화도 서북쪽 섬) 것은 버금간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강화도 화문석은 근래에 널리 알려진 듯하다.   왕골은 사초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서 줄기는 세모꼴이며 줄기 꼭지에서 꽃이 나와서 잔 꽃이 피며 1.2∼1.5m로 자라며, 줄기의 단면은 사각형을 이룬다.. 4월 중순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5㎝쯤 자라면 5월 초순에 옮겨 심었다가 8월 상순부터 9월 사이에 거두며 길이는 1.5∼2m에 이른다.   줄기의 섬유 조직은 매끄러우며 윤택이 나고. 매우 질기며 다 자라면 누른빛으로 변한다. 거두어들인 왕골은 줄기의 각에 찬이슬을 맞혀가며 3∼4일 동안 바짝 말린다. 이렇게 하여야 빛이 하얗게 바래서 윤기가 난다.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로서(길이 30∼50㎝)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낸다. 겉껍질이라야 염료가 적게 들고 물감이 곱게 먹는다. 물든 왕골은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물감으로는 회색·검은색·붉은색·누른색·진황색·자색·남색·녹두색·반물 등 아홉 가지를 쓴다. 왕골은 자리틀에 올리기 전에 물에 적셔둔다. 물기가 있으면 부드러워서 매기 쉬운 반면 마른 것은 갈라지거나 부서지며 잘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배수가 불량하고 유기물의 함량이 높아서 벼의 재배에 부적합한 저습답 또는 고래실에서 많이 재배된다. 왕골은 줄기를 피부(皮部)와 수부(髓部)로 분리하여 건조시킨다. 실 모양으로 가늘게 쪼개어 말린 것으로는 돗자리, 방석, 여름베개, 모자, 발 등을 만들고 질긴 왕골속으로는 둥구미를 만든다. 특히 보성의 용문석은 뒷면을 이것으로 덧댄다. 왕골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재배되는 우리나라 특유의 공예작물로, 그 생산도 우리나라에 한정되어 있다.   골풀은 골풀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높이가 50∼100㎝ 정도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지에도 분포하는데, 돗자리 이외에 방석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돗자리는 거의 농가의 부업으로 영남, 호남 지방이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화문석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짜게 마련이어서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며 다만 무늬에 다양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것을 매는 사람 수는 너비에 따라 달라서 석 자에서 다섯 자 크기에는 두 사람, 여섯 자에서 일곱 자 크기에는 세 사람, 여덟 자에서 아홉 자 크기에는 네 사람, 열 자에서 열두 자 크기에는 여섯 사람이 한 동아리가 된다.   세 사람이 너비 예닐곱 자의 화문석 한 장을 짜는 데에는 닷새쯤 걸린다. 초보자는 2년쯤 배우면 기술을 익힐 수 있다. 흔히 화문석과 등메를 혼동하나 등메는 한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이다. 재료 또한 달라서 등메에 드는 참골은 줄기가 둥글고 가늘다. 예로부터 화문석보다 등메를 윗길로 쳤다.   화문석의 종류 화문석 꽃방석 화문석 꽃방석, 돗자리는 왕골에 물을 들여 손으로 덧 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를 말한다. 왕골은 재배가 손쉽고 이를 매는 일도 까다롭지 않아서 이것이 자라는 곳에서는 거의 누구나 짤 수 있다. 그리고 겉이 매끄럽고 기름져서 물이 잘 스미지 않고 매우 부드럽다.   여름철에 화문석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눕거나 앉으면 더위를 덜 수 있어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무늬 또한 아름다워 집치장에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더구나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여왔던 우리에게 화문석은 빼놓을 수 없는 살림살이의 하나였으며, 이것이 일찍부터 중요 공산품으로 손꼽혀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대청마루에 돗자리를 깔아놓은 모습으로 왕골이나 골풀의 줄기를 잘게 쪼개어 친 자리다. 삼국사기에 수레를 대발과 왕골(莞草)로 꾸몄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왕골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 별문석(別紋席), 호문석(虎紋席), 난초석(蘭草席)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용문석(龍紋席) 궁중에서 잔치를 여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돗자리의 일종이다. 특히 용문양을 수놓은 왕골 돗자리를 용문석이라 하는데, 전라남도 보성의 것이 유명하여 200년 전부터 궁중에 납품하였다. 용문석의 무늬는 가장자리에 ‘ㄹ’자 모양의 선을 두르고, 자리 중앙에 여의주를 넣은 다음 양편에는 청룡과 황룡이 마치 여의주를 다투듯 꼬리치는 모습을 수놓았다.   제조방법에 따른 분류 같은 왕골로 만들더라도 제조방법에 따라 돗자리와 자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즉, 돗자리는 가마니틀과 비슷한 돗틀에 미리 날을 걸어두고 골을 바늘대에 걸어 지르고 바디질을 하여 짠다. 자리는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장목에 늘어놓고 골을 대어 엮어나간다. 돗자리는 날이 속으로 감춰지고 자리는 날이 밖으로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자리에 속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인천광역시 강화에서 만드는 화문석(花紋席)이다.   보성 용문석 보성 용문석은 400여년간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작업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취급되었고 근래에는 선물용으로 주문 생산되고 있다.

  • 안동왕골, 화문석, 용수초지석·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용문염석(龍紋簾席)

    안동 왕골 조선...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는 극찬을 늘어놓았다. 화문석의 수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열은 더욱 높아졌다.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영남의 안동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친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에서는 해서·배천·연안의 것을 제일로 쳤으며, 경기 교동(喬桐 : 강화도 서북쪽 섬) 것은 버금간다.”고 하였다. 신라시대에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통문관지 通文館志에 따르면 한 번의 동지사행(冬至使行) 때 중국에 보낸 화문석이 124장에 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오는 관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양을 선사하였다.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기관은 장흥고(長興庫)로서,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들였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에 석전(席典)으로 불리던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에 들어와 화문석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 내지 선사품이 되었다. 고려초에 요나라에 보낸 특산품 가운데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龍鬚草地席)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탐내었다고 한다. 왕골[莞草] 은 경상도(榮川郡, 永川郡, 醴泉郡, 상주목, 선산도호부, 안동대도호부, 용궁현, 청송도호부, 풍기군) 전라도(함평현, 보성군) 충청도(홍주목) 평안도(박천군, 안주목)에서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있다.   진상품 관련이야기 화문석은 예로부터 용수초지석·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용문염석(龍紋簾席)·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만화석(滿花席)·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채화석(彩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황화석(黃花席)·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용수초지석이라는 이름은 왕골이 용의 수염처럼 생긴 데에서 왔다. 오채용문석·용문염석·오조용석은 용모양의 무늬를 넣어 짠 데서 왔다. 오채용문석은 다섯 가지 색으로 짠 용무늬 꽃자리이고, 오조용문석은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 꽃자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극상품이어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왕실에서 중국에 보내는 선물용으로 생산되었다. 용문염석은 용무늬 발로서 역시 궁중에서 썼으리라고 짐작된다.   상품정보 왕굴·완초(莞草)라고도 하며, 학명은 Cyperusexaltatus var. iwasakii T. KOYAMA이다. 왕골은 열대지방에서는 숙근성(宿根性)이나, 온대지방에서는 1년생 내지 2년생 초본식물이다. 원래부터 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언제나 논에서 재배한다. 왕골은 줄기를 피부(皮部)와 수부(髓部)로 분리하여 건조시킨다. 실 모양으로 가늘게 쪼개어 말린 것으로는 돗자리 ·방석 ·여름베개 ·모자 ·발 ·핸드백 ·담뱃갑 등의 수공예품을 만들며, 굵게 수부를 붙여 쪼갠 조피(粗皮)는 신 ·슬리퍼 ·바구니 등을 만든다. 왕골속은 비교적 질겨서 끈을 꼬아 마사(麻絲) 대신 쓰며 잎은 새끼를 꼬거나 누엣자리 ·깔개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왕골은 한국 특유의 공예작물로서 그 생산도 한국에 한정되어 있는 실정인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재배한다. 특히 인천 강화, 경상북도 선산, 전라북도 남원 등에서 왕골 생산과 수공예품 가공을 많이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화의 화문석과 남원의 용문석은 돗자리로서 유명하다. 잎 : 줄기 밑 부분에 나며 길이는 줄기의 길이 정도이고 기부는 잎집으로 줄기를 싸며        가장자리가 깔깔하고 뒷면의 중앙맥이 뚜렷하다. 열매 : 수과는 타원형이며 길이 1mm정도로서 연한 볏짚색이고 3개의 능선이 있다. 꽃 : 화경은 높이 60-200cm이며 화경의 1/4-2/5가 엽초로 싸인다. 꽃은 9~10월에 피며 포는 4-5개로서 잎같고 화서보다 훨씬 길다. 가지는 5-10개로서 긴 것은 길이가          20cm에 달하며 다시 갈라져서 산형으로 퍼져 1-5개의 화수로 갈라진다. 화수는           원주형이고 길이 2-4cm, 지름 1-1.3cm로서 소수가 다소 성글게 달리며 황록색이다.      소수는 비스듬히 퍼지고 길이 5-7mm로서 10-20개의 꽃이 달리며 인편은 난형이고       길이 1.7-2mm로서 뒷면의 능선은 녹색이며 끝이 뾰족하고 젖혀진다. 암술대는 수과보다    2배 정도 길고 끝이 3개로 갈라진다. 줄기 : 높이 80~150cm이고, 굵고 둔하게 세모지다. 분포 : 전국 각처에서 재배하며, 야생하기도 한다. 형태 : 1년초 내지 2년초 크기 : 화경(花莖)의 높이 60-200cm. 생육환경 : 논이나 습지에서 재배한다. 결실기 : 10월 이용방안 : 화경을 돗자리나 기타 세공품 원료로 쓰인다.   용도 왕골은 쪼갠 줄기를 건조하여 자리·방석·모자 등을 만들고, 속은 건조하여 신·바구니·노끈 등을 만든다. 그리고 줄기뿐만 아니라 잎도 제지원료로 사용한다. 특히, 강화도의 화문석은 민속공예품으로 유명하다.   관련근거 및 출처 두산백과,한국화재식물도감,『공예작물학』(손응룡, 상지문화사, 1969),『작물학개요』(조재영 외, 향문사, 1983)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대하소설),『인간문화재』(이용해, 어문각, 1963),『한국민속대관』 5(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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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도 화문석

    사회, 지리 교과서...역의 특산물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그중에서 강화도 특산물로는 인삼, 화문석, 새우젓 등이 나옵니다. 그런데 화문석 .. 이게 뭔지 잘 모르겠더구만요 .. 화문석? 돌인가? 돌이 무슨 특산물이야? 하는 엉뚱한 생각 .. 지금 어른이 되어서 화문석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지요..화문석이 뭔지 알았다고는 하지만, 이게 또 제대로 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돗자리인가? 돗자리가 무슨 특산품이 되는 것이지? 하는 호기심이 발동됩니다. 하지만 그냥 대충 알고 넘어가기에 화문석이 갖고 있는 힘은 대단하였습니다. 강화도에는 화문석 테마마을이 있을 정도로 화문석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농촌에 활력을 주는 특산품으로서의 역할도 기대되는 화문석이었습니다. 화문석마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에 있습니다. 마을에서는 화문석의 재료가 되는 왕골을 직접 재배하고, 왕골을 이용하여 화문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화문석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화문석을 테마로 하여 농촌체험 관광까지 할 수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에서 준비하고 있는 농촌체험으로는 우선적으로 화문석 만들기 체험이 있습니다. 화문석 만들기 체험은 연중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밖에 계절별로 농가에서 민박도 하고, 각종 농작물 수확, 두부 및 순무김치 등을 만들어 보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화문석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화문석문화관으로 향합니다. 매표소 표기도 화문석으로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입장료는 1천원입니다. 화문석문화관에서는 화문석 만들기 체험이 가능합니다. 1명당 5천원이네요.. 그렇게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화문석 작품을 볼 수 있고, 화문석의 재료가 되는 왕골에 대해서도 제대로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화문석입니다. 한번쯤은 다 보셨을 것입니다. 화문석을 한자로 풀어보면 꽃 화(花), 무늬 문(紋), 자리 석(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꽃무늬 돗자리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꽃무늬를 많이 넣었을지 몰라도, 요즘은 다양한 문양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단순히 돗자리로서 뿐만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화문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왕골, 밀짚, 갈대, 닥나무, 띠 등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화문석의 재료는 왕골입니다.. 강화도 일대는 질 좋은 왕골이 생산되고 있어서 화문석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왕골뿐만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은 여러가지 풀을 이용하여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짚을 올려 초가집도 만들고, 각종 농기구도 만들어 사용했구요 .. 이것이 화문석의 주 재료인 왕골입니다. 왕골은 왕굴, 완초 등으로도 불리는데, 왕골의 줄기를 이용하여 화문석을 만들게 됩니다. 잎은 신발,바구니 등을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줄기, 잎 등 버릴 것 하나 없는 왕골입니다. 왕골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랍니다. 그 중에서도 강화도의 왕골의 질은 아주 뛰어납니다. 강화도 왕골은 조생종으로서 성질이 강하고 부드러우며, 빛깔이 고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강화도에서는 모내기를 두 번 합니다. 벼를 재배하는 모내기가 있고, 왕골을 재배하기 위한 모내기가 있는 것입니다. 왕골 모내기는 벼 모내기보다 일찍 시작합니다. 수확은 7월 말에서 8월 초 경에 이루어집니다. 방동사니과에 속하고 1년생 초본 식물입니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 재배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화도와 중부 이남의 따뜻한지역에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왕골을 이용하여 화문석을 만드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습니다.. 화문석 만들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왕골에서 화문석으로 탄생하기까지 60만번의 손길이 가야 된다고 하니, 그 정성이 대단합니다. 왕골을 심고, 수확하고 .. 이것을 다시 쪼개고 말리고, 왕골에 색을 입히기까지의 과정은 사람의 손 하나하나 거쳐야 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정밀하게 도안을 만들어 내는 일까지 더해지면, 단순한 특산품을 너머 예술이 되는 것입니다. 화문석 짜는 틀입니다. 화문석 하나 만드는데 2~3명이 한 조가 되어 7~10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고드레돌 하나하나 넘기는 소리는 강화도 곳곳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요즘 기계화, 중국산 등으로 넘쳐난다고 하지만, 한땀 한땀 이태리 장인의 솜씨보다 더 뛰어난 강화도 화문석인 것입니다.. 화문석 만드는 순서를 정리해봤습니다..1.날실을 고드레돌에 감고 날실 두개를 하나로 묶어 1.5cm 간격으로 자리틀에 매답니다.2.왕골 속감을 겉감으로 감싸 한데 모아서 엮고, 무늬는 도안에 따라 색왕골을 덧대고 엮습니다.   3.휘감은 두쪽 왕골은 남겨두고, 세번째 왕골을 꺾어 휘감아 안감속으로 넣어 엮습니다.4.화문석이 다 짜여지면 나일론 실을 매듭지어 완성합니다. 화문석으로 병풍을 만들었습니다.그러면 화문석을 언제부터 만들었을까요? 문헌에 의하면 신라시대부터 만들기 시작되어, 고려 때 활성화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수요가 급증했구요 .. 고려 때는 개성인삼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때에는 외국 사신에게 주는 선물로서 화문석의 인기가 높았다 하구요 .. 화문석의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화문석이 과거의 유물이고, 전통가옥에만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현대의 아파트와 같은 주거형태에서도 화문석은 빛이 날 수 있습니다. 화문석은 윤기가 좋고, 통풍효과가 탁월합니다. 여름철에는 땀, 습기를 흡수해주고, 겨울에는 외부로부터의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오래 사용해도 부스럼이 없습니다. 화려한 듯 하면서도 소박한 무늬는 화문석의 품격을 더욱 높여줍니다. 인테리어 측면에서도 효과 만점입니다. 왕골로 화문석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합, 사주함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도구로도 제작 되어 사용 될 수 있습니다. 가방과 모자도 만들 수 있군요 .. 이렇게 만드는데 20일 정도가 걸렸다고 하니, 그 정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골로 만든 이러한 제품들은 자연친화적이라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 재료를 알지 못하는 화학재료를 사용한것 보다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고,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래도 역시 화문석이 제일 멋있습니다.. ㅎㅎ ... 과거에는 화문석의 무늬로 용, 호랑이, 십장생 등을 많이 그려 넣었답니다. 그냥 단순히 생각해봐도 이런것들만 그려 넣었을 것 같아요 .. 하지만 요즘은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강한 무늬를 넣어, 화문석의 감춰진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화문석을 만드는 곳이 강화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강화도 화문석이 특히 유명한 것은 이 문양의 영향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로부터 특별한 문양이 들어간 화문석을 만들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당시 강화도에 있는 한충교라는 분이 명에 따라 문양을 만들고, 이후 강화도의 화문석은 더욱 유명해집니다..다만 문제는 가격 .. 저기 벽에 걸려 있는 작품 하나가 1,000,000원 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 ㅎㅎ 화문석문화관에서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작은 크기로 화문석도 만들고, 핸드폰 고리도 만듭니다. 체험비용은 1인당 5천원이고 1~2시간 정도 걸립니다.. 체험 하려면 미리 예약해야 되요 .. 취미로 왕골 공예를 배우기 위한 과정도 있습니다. 주2회(수, 금)에 이루어지고, 역시 전화로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합니다 출처: http://raonyss.tistory.com/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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