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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종이(한지),닥나무, 꾸지나무, 산닥나무(안피, 雁皮), 삼지닥나무

     한지(韓紙, 문화어:조선종이) 또는 닥종이는 한국 고대의 종이로 중국의 제지술을 도입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고, 그 품질 또한 매우 우수하였다. 삼지닥나무•안피나무•닥나무•뽕나무등의 수피(樹皮)의 섬유를 뜬 것이다. 용도에 따라 창호지, 복사지, 화선지, 태지로도 분류할 수 있다. 한지는 부채와 연, 바구니, 종이 상자 등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한지는 외국의 양지보다 훨씬 오래 간다. 외국의 양지는 200년이지만 우리나라의 한지는 그의 1000년이나 더 긴 1200년이나 지속된다. 또한 우리가 쓰는 A4용지보다 질기며,글쓰기와 그림그리기가 매우 잘된다고 한다. 특히, 한지는 옻칠을 할 경우 2100년 까지 간다. 오늘날에도 한지를 많이 만들고 있다. 한지의 멋스러움과 좋은 점을 알고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도 한지에 물을 들여 여러 색깔의 한지를 만들기도 한다.   진상품관련근거 닥나무. 닥종이[楮]는 경상도(남해현, 밀양도호부, 醴泉郡, 의령현, 진주목, 청도군, 초계군, 풍기군, 합천군) 전라도(곡성현, 광양현, 구례현, 낙안군, 남원도호부, 담양도호부, 동복현, 무주현, 보성군, 순창군, 옥과현, 용담현, 임실현, 진안현, 함평현, 해남현) 평안도(강동현, 박천군, 삼등현, 상원군, 성천도호부, 안주목, 증산현)에서 대전,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에 기록되어있다.   한지의 원리 한지의 주원료로는 닥나무(楮 Broussnetia Kazinok Sieb)의 인피섬유가 사용되어왔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닥나무와 꾸지나무이다. 이중 닥나무는 우리나라 고유의 품종이지만 꾸지나무(構 Broussnetia Papyrifera Vent)는 일본으로 부터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닥나무와 꾸지나무는 오래전부터 구분없이 식재해왔기 때문에 잡다한 유전자를 가진 잡종으로 변해 식별이 어렵다. 꾸지나무는 머구쟁이, 부닥, 개닥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지의 주원료 : 닥나무, 꾸지나무, 산닥나무(안피, 雁皮), 삼지닥나무 등 -한지의 부원료 : 닥풀(황촉규, 黃蜀葵) 이것은 초지시 초지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즘은 PAM 또는 PEO같은 화학점제를 사용한다.   한지의 변천사 1) 한지의 기원 고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는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 없지만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 종이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지술을 도입하여 제지를 더욱 발전 시켰고, 그 품질 또한 매우 우수하였다. 현존하는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니경의 종이가 그 증거라 하겠다. 우리나라 종이의 기원 및 전래는 몇가지 설이( 2세기- 7세기 )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2세기 설은 현재까지 한지의 주원료인 닥은“저(楮)"가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tag", 혹은 “tiag"라는 음으로 읽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닥은“저(楮)"의 음이“닥"으로 읽혀지고 있던 시기에 종이원료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후“닥"이라는 음은 화석화되어 훈(訓)이 되었고, 음(音)“저"는 6세기 이후 중국의 음이 새롭게 들어온 결과일 것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2세기 경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종이나“저(楮)"를 사용한 제지법이 그 명칭과 함께 전래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3세기 경 후한말 낙랑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종이와 종이 만드는 법이 들어 왔다는 설이 있다.   첫째: 평남 대동군 남정리 채협총에 근거한다. 서기 1931년 조선 고적연구회 사업으로서 발굴된 후한 말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고분 채협총에서 권자본(卷子本)의 질통(帙筒)으로 보이는 채문칠권통(彩文漆卷筒)과 묵분(墨粉)이 붙어 있는 벼룻집, 오수전, 화천, 채문칠권통, 동경, 채화칠협 등이 발견됨으로서 당시에 종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고분의 밀폐된 칠관 속에서 발견된 종이로 보이는 섬유의 꼴이 닥종이가 물에 젖어 덩어리진 것과 같았다고 하여 한대의 종이와 이것이 비슷했을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이 종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둘째: 백제는 서기 285년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채륜이 종이를 만든지 180년 뒤로 이미 종이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셋째: 3세기말부터 4세기말까지 중국 대륙에서 난리를 피해 우리나라로 온 이주민들이 많아 이들 가운데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넷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대로 중국에서는 종이가 이미 다른 서사재료를 대치했던 284년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 등이 종이 서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왕인이 천자문을 전한 것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채륜의 제지술 발명보다180년이 경과한 후라고 본다면 서기 200년대 후반에는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2세기에서 늦어도 4세기까지는 우리나라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을 것이다. 4세기 말이라는 견해는 동진의 마라난타가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이때 많은 책과 제지술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된다. 한반도의 제지술은 불교의 전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교 전래시기를 보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 진(秦)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3년 후인 서기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승 마라난타가 진(晋)나라에서 들어와 불교를 펴기 시작하여 계율종, 삼륜종, 성실종의 3종파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때는 이미 종이가 불경으로서는 일반화되었다고 보인다. 신라는 눌지왕(서기 417~591)연대에 전래된 것으로 보며 법흥왕 14년 (서기 527)에 공인되었는데 북방 고구려계와 양•진의 남방계가 그 유입 경로라고 한다. 따라서 최소한 이 무렵에는 제각기 종이에 대한 수요 자극과 자체 생산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6세기말~7세기 설은 다음의 세 가지에 근거한다. 첫째: 6세기에 신라에서 많은 유학생과 승려가 당으로 유학을 가는 등 교류가 많아 먹, 붓, 종이 만드는 법이 전해졌을 것이다.   둘째: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는 석가탑을 창건할 751년에 넣은 것으로 사려되므로 이때 종이 만드는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셋째: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채색, 종이, 먹, 연자방아 등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맷돌 등을 이용하여 섬유를 잘게 갈아 종이를 만들었고, 담징이 함께 전했다고 하는 맷돌은 종이와 관련 용구로 추측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에도 맷돌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이로 우리나라의 제지법이 중국의 종이 기술과 동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기록은 610년 전후가 우리나라 한지(韓紙)와 중국의 화지(華紙)가 구별되는 시기라는 점도 시사한다.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8세기 이후의 종이는 중국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가 아니고 두드려서 종이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평양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종이로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섬유를 자르지 않고 두드려서 고해(叩解)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보다 후대의 종이 [법화경]의 품질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7세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초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지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술은 그 훨씬 이전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시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2)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한지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시기 이전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둘어온 종이와 그 제조법은 상당기간 동안 중국의 그것을 모방하였으나 이때부터는 우리의 한지를 이룬다. 삼국시대의 고분 구조상의 결격으로 인해 식물질의 보존이 나빴기 때문에 제지기술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헌자료나 고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에 제지술과 종이가 2세기경부터 7세기 사이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할 때 북방과 남방은 서로 다른 경로에 의하여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함경도 지방 이북은 추워서 닥을 재배하기 마땅치 않지만 마포(麻布)는 비교적 용이하게 얻을 수 있고, 남쪽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닥 재배 적지로서 원료 조달에 문제가 없으며 품질 또한 좋기 때문에 고구려는 낙랑으로부터 주로 마(麻)를 사용하는 방법을, 백제는 닥(楮)을 사용하는 제법을 중국의 남부지방으로부터 전해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도 교주(交州) 등 남부 지방에서는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 모두 제지의 중심지는 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수요 계층도 수도와 인근의 귀족층 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종이와 그 제지법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문헌에서 신라 수도 경주를 의미하는 계림의 종이의 우수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제지법을 전한 사람은 고구려의 승 담징으로 때는 서기 610년 신라 진평왕 32년, 고구려 영양왕 21년, 일본 추고천황 18년 이다. 이것으로 7세기 경을 우리나라에서 제지술이 일반화된 시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통일신라시대 제지 중심지는 경주 지방으로서 여기서 생산하는 종이가 관용지의 수요를 충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추지가 국내외에 유명지종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국보 19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의 용지는 서기751년 이전의 닥종이임이 고증되어 있으며 지질과 인쇄술로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755년 사성(寫成)된 백지묵서화엄경(白紙墨書華嚴經)은 8세기 중반의 것으로 고해나 정선이 상당히 잘 되어 있고 표백 상태도 매우 좋아 대단히 발전된 기술을 지닌 기술자가 정성들여 만든 종이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종이는 긴 섬유를 두들이는 고해를 하여 만든 한지이며 중국의 것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는 아니다. 경주의 고분에서 출토된 관의 옷칠 내장용 종이의 정교함으로도 당시의 종이를 짐작할 수 있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우리종이의 발전기였다. 삼국시대 각 국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은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고려가 세워짐으로써 보다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원료, 생산자, 생산지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불교가 성행한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으로 인하여 사경이 많았고 여러 겹을 붙인 종이가 많았다. 따라서 두껍고 질기며 광택있는 종이를 선호하였고 이에 적합한 닥나무를 수급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지리적 조건이 좋은 지방에 지소를 설치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갖가지 원료를 사용한 특색있는 종이가 만들어졌다. 종이에 다듬이질을 했고 노란색이나 감색으로 염색을 한 가공지가 많았다. 고려지는 견인하고 광택이 나고 희었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확대된 불경 조판사업으로 종이 생산기술은 크게 발달하였으며, 국가에서도 이들 종이 생산 기술자들을 지장(紙匠)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이들을 모아 집단으로 구성케하여 이들의 기술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5) 조선시대 조선조 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완성기이다. 통제기관의 설치, 원료와 기술의 다양화, 용도의 대중화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문물제도 개혁과 문화적 관심으로 태종 때 국영 조지소를 설치하여 관영화하였고, 닥으로 만든 돈인 저화제도의 정착에 고심하는 등 제지공업의 중흥에 진력하기 시작했다. 세종때 조지소를 조지서로 개칭하여 역대 왕은 이 조지서를 통하여 당시 급격한 수요증대에 따른 원료의 조달, 종이의 규격화, 그리고 품질 개량을 연구•도모하였다. 수공업 중 제지생산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경•외장 중 지장수의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제지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제지된 것으로 보이는 태지가 본격적으로 초조되었고, 미려한 종이를 만드는 노력이 관•민 모두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는 그 용도가 많아 우리나라의 전국에 걸쳐 생산되었다. 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종이 품질은 고려조의 성가를 이어받아 세종시대까지는 손색이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후까지도 품질에 대한 신뢰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세종조 이후의 종이 생산의 관영화와 적극적인 증산책은 초기에는 발전하는 듯 하였으나 폭발하는 수요, 원•명•청대로 이어지는 혹독한 조공지에 대한 압력, 여러차례 전란으로 점차 자발적인 창조성이 위축되고 획일화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닥원료의 부족으로 짚•보리•갈대 등의 부원료 혼합으로 품질은 저하되었다. 제지술의 전통은 임진란을 기점으로 서서히 하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소의 연이은 환난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바닥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장에 대한 보호 육성없이 혹사시켜 훌륭한 제지술의 전통은 기술적 퇴보를 자초했다. 말기에 이르면 태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가공지는 거의 없이 중국과 일본의 종이가 수입되어 많이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및 참고문헌 국가기록유산,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    

  • 전주한지, 창호지, 장판지, 종이, 파피루스, 종려나무 잎, 운룡지, 장지, 화선지, 피지, 순지

    전주한지 전라북도 전주시 일원에서 생산되는 한지  이곳의 한지제조업은 입지와 전주천의 깨끗한 수질, 원재료 및 생산조건에서 유리할 뿐만 아니라 제조기술면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적으로 숙련된 기술을 겸비하고 있고 또한 한지의 용도가 서예지·공예지·창호지·장판지 및 기타 영구보전지 등 다양하여 옛날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한지의 생산은 닥나무의 생산에 영향을 받으므로 고려시대부터 닥나무의 재배를 제도화하여 지방관아에서는 반드시 닥나무 밭을 가꾸도록 하였다. 전주지방 근교에 닥나무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이를 원재료로 한 한지제조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진상물로서 전주한지는 생산량과 품질면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근래에는 국내수요뿐만 아니라 일본·대만 등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종이’하면 전주한지를 이를 만큼, 전주한지의 전통과 가치는 매우 크다. 종이는 화약, 나침반과 함께 중국의 3대 발명품이라고 불린다. 우리나라는 중국 다음으로 일찍부터 종이를 사용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종이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종이의 발명 종이는 글과 그림을 기록하기 위한 기록매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다양한 기록매체를 사용했다. 수메르인들은 점토판 위에 문자를 새겼고,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5왕조(BC 2494∼2345)시대부터 파피루스를 사용했으며, 인도인들은 종려나무 잎에 글씨를 썼고, 유럽인들은 양가죽에 문자를 기록하다가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해 양피지가 발명되었다.   종이를 만들기 이전, 중국인들은 갑골, 청동기, 목간, 죽간, 실크 등에 글자를 기록했다. [사기]의 ‘골계열전’에 의하면, 동방삭(東方朔)이 한나라 무제(武帝)에게 상서를 올렸는데, 그 양이 무려 3,000편의 죽간이어서 두 사람이 들고서야 겨우 궁전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죽간이나 목간은 이처럼 무겁고 부피가 커서 사용에 불편함이 많았다.   처음에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낡은 마(麻) 섬유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종이 유물은 중국 감숙성 천수시 방마탄 한나라 고분에서 발견된 방마탄지(放馬灘紙)로, 기원전 180〜124년대의 것이다. 이 밖에도 파교지, 마권만지, 옥문지 등 여러 종이들이 발견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기 105년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기존의 종이를 개량해 나무껍질, 마, 해진 천, 그물 등을 활용해 물에 불리고, 돌절구에 넣어 찧고, 불을 피워 삶고 다시 물을 빼서 말린 ‘채후지’라는 종이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製紙(術)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고구려, 종이를 사용하다  고구려 집안(통구)시의 통구사신총 벽화의 일부분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신선의 모습이다.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은 대략 3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와 베트남에 가장 먼저 전해졌다. 고구려와 백제가 먼저 사용하고, 신라는 다소 늦었다. 고구려에서 사용된 종이 가운데 유물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은 4〜5세기경 유물로 추정되는 것으로, 평양 모란봉 동쪽 청암동토성에서 불꽃뚫음무늬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마지(麻紙)와, 평양 대성산성 돌함 안에서 발견된 불경(佛經)이 적혀진 종이다. 이 종이들은 고르고 치밀하게 엉키어져 있는 삼섬유로 만들어졌다. 고분벽화를 통해 보면,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 서쪽 측실 벽화에서도 종이를 볼 수 있다. 무덤 주인공에게 보고하는 신하가 들고 있는 문서가 목간보다는 종이로 보인다. 6세기에 만들어진 통구사신총에는 책상에 종이를 놓고 먹을 묻혀 붓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 신선이 그려져있다.   고구려에서 종이가 사용된 까닭은 문서행정의 필요성과 서적, 특히 불교 경전의 수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7대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을 설치하여 학문을 가르쳤고, 다음해에는 법률인 율령을 반포했다. 아울러 불교를 승인하여 사찰을 건립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서적의 수요가 늘고, 통일된 법령인 율령을 시행하면서 행정 문서가 늘어났으며, 불교 경전을 제작하기 위한 종이 수요가 늘었다. 삼국시대의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기술자인 경우가 많았다. 610년 담징 스님이 일본에 종이, 먹 등을 만드는 법을 전한 것처럼, 사찰은 종이를 직접 제작한 곳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불교를 신라보다 일찍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 시기부터 한(漢)나라를 비롯한 중국세력과 잦은 교류를 하다 보니, [사기], [문선] 등 다양한 서적들을 수입해 갖고 있었다. 따라서 종이로 책을 만드는 방법을 일찍 터득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종이를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서화사(書畫史)]에는 수, 당나라에서 좋은 글과 그림은 고려지(髙麗紙)로 맨 앞 표지를 장정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고려지’는 고려시대에 송나라로 수출한 질 좋은 종이를 말한다. 그런데 [담원찰기(湛園札記)]에는 “건중(建中) 원년(780년)에 왜국의 사신이 와서 방물을 바쳤는데,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는 견지(繭紙-누에고치로 만든 종이)와 윤이 나는 것이 비슷하여,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것이 지금의 고려지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고려지는 고려(918〜1392)가 아닌 고구려에서 만들기 시작한 종이임을 알 수가 있다.    너무나 비싼 종이 고구려가 종이를 수출할 정도였다고 해도, 당장 종이가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다. 408년에 만들어진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마사희(馬射戱) 장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화살이 목표에 몇 개 맞추었나를 기록하는 주기인(注記人)은 나무에 글을 적고 있다. 귀족들이 즐긴 놀이 장면이었지만, 종이가 아닌 나무, 즉 목간(木簡)에 그들이 과녁을 맞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간이 쓰인 것은 종이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값비싼 귀중한 물건인 만큼 종이는 관청을 통해 철저히 관리되었다. 경주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2호 목간에는 종이구입과 관련한 내용이 적혀있다. 어떤 관청에서 종이를 구입하라는 명령을 했고, 담당자가 경(經)에 쓸 희지 않은 종이 2근(斤)을 아직 보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연구자마다 약간의 해석 차이는 있어도, 경전에 쓰이는 종이의 구입과 관련하여 관청에서 사용된 문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는 토지제도인 전시과를 제정하면서 지방 관청의 운영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공해전시(公廨田柴)를 지역의 인구 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500정(丁) 이상인 주와 현에는 지전(紙田) 15결, 100정 이상의 주, 현에는 10결, 20정 이하에는 지전 7결, 향부곡(鄕部曲) 등에도 인구에 따라 5결, 3결, 2결을 지급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사용될 종이를 구입하기 위해 특별히 땅을 준 이유는 문서 행정에 필요한 종이의 값이 당시에는 매우 비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활쏘기 결과를 기록하는 사람. 종이가 아닌 목간에 결과를 적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이의 재활용 비싼 만큼, 종이는 철저하게 사용되었다. 한번 사용한 종이는 뒷면을 다시 활용했고, 다 사용한 종이일지라도 버리지 않았다. 752년에 만들어진 [좌파리가반(佐波理加盤)] 문서를 보자. 이것은 앞면에는 관청에서 돼지고기, 말고기, 쌀, 콩을 받는 내용을, 뒷면에는 벼를 도정(搗精)시킨 내용을 기록한 문서인데, 폐기된 후 일본에 수출할 사발의 포장재로 재활용되어 일본 정창원(正倉院- 왕실 유물창고)에 보관되었다가 사발과 함께 발견되었다. 신라 [촌락문서(村落文書 ; 695년?, 755년?)]의 경우는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책 표지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 삼베와 함께 속지로 넣어져 활용되었다가 발견되었다. 폐기된 문서 가운데는 옻칠그릇의 종이덮개로 사용된 것도 있는데, 옻의 건조를 막고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에는 통풍이 잘 되는 종이가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서를 칠지문서라고 하는데, 옻이 스며든 문서는 건조나 부식이 되지 않아 오래 남는다.    값싼 목간을 사용하다 신라 경덕왕 때인 755년에 만들어진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 196호)]에는 이것을 만들게 된 사연을 끝부분에 적어 놓고 있다. 여기에는 화엄경을 베껴 쓰게 된 과정에서 관련된 인물들의 출신지, 성명, 관 등이 적혀있다. 이들은 지작인(종이를 만든 자) 1인, 경필사(불경을 베껴 쓰는 자) 11인, 경심장(두루마리 맨 끝에 붙이는 축(軸)을 만드는 전문가) 2인, 불보살상필사(경문 앞에 붙이는 불보살상 그림 그리는 자) 4인, 경제필사(사경의 마지막에 제목을 써넣는 전문가) 1인을 포함해 총 5종 19인이다. 이 가운데 지작인과 경필사는 모두 광주 5인, 남원경 2인, 정읍 4인 등 옛 백제 지역 출신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상당히 높은 관직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종이를 만든 황진지라는 사람의 관등은 ‘내마(柰麻)’로, 이는 신라 관등 가운데 11위를 차지하며 5두품이 할 수 있는 관직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관직도 내마, 또는 대사(大舍-12위)다. 이들은 숙련된 기술자였던 것이다.  값비싼 종이에 함부로 글을 써서 종이를 버릴 수는 없으므로, 종이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습이 필요하다. 이 경우 연습은 종이가 아닌 목간을 사용했다. 현재까지 대략 500여점 이상의 목간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목간은 나뭇가지를 베어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가격 부담이 없다. 또한 글을 쓰고 고치려고 하면, 칼로 나무껍질을 베어내면 된다. 따라서 현재 발견된 목간에는 글자를 연습한 것, 낙서한 것, 잘못 쓴 글 등을 볼 수 있다. 목간은 종이에 정식 문서를 쓰기 전에 관리들이 모은 정보를 기록하기도 하고, 물건에 붙인 꼬리표로도 사용되었다. 함안 성산산성에서는 7세기 초 여러 지역에서 보내온 물건에 붙은 꼬리표 목간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꼬리표 목간은 고려시대 침몰선 발굴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목판 인쇄와 종이 우리 역사에서 종이 사용이 크게 늘어난 계기로는 7세기 후반 삼국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불교가 널리 퍼진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라 불경을 읽고자 하는 수요도 늘어났다. 내용이 많은 불경을 언제까지 베껴서 보급할 수는 없는 터. 결국 신라는 목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8세기 초)을 탄생시켰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공급이 원활해지자, 종이 수요도 늘고, 따라서 종이 만드는 기술도 발전했다.    고려지 - 고려의 주요 수출품 신라에서 만든 종이는 ‘계림지(鷄林紙)’라 불리며 당나라에도 수출되기 시작했다. 신라 종이는 닥나무 껍질을 두드려서 만든 하얗고 반질반질한 종이라는 뜻으로 ‘백추지(白硾紙)’라고도 불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종이는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딜 만큼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이런 기술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서천 추동리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문서 (1119년, 또는 1179년의 것으로 추정됨)    송나라 때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고려의 닥종이는 밝은 빛을 내므로 모두들 좋아하며 이를 일러 백추지(白錘紙)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종이는 송나라에서 비단 종이(繭紙)라 여겨져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종이는 고려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고려사]에는 종이 생산을 위해 인종 23년(1145년)에서 명종 16년(1186년)에 걸쳐 전국에 닥나무를 재배할 것을 명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국가적으로 종이 만드는 것을 장려했던 것이다. 종이 만드는 장인은 공조서(供造署)라는 국가기관에 예속되어 있었고, 종이를 만들어 국가에 바치는 특수 지방 행정 단위인 지소(紙所)도 운영되었다. 고려는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에 능통한 자들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로 인해 유교 경전이나 문장을 공부하는 자들이 늘어나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또한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불경에 대한 수요도 더욱 커졌다. 때문에 종이의 공급과 수요 모두 크게 늘었으므로, 종이 가격 또한 크게 떨어졌다.   조선의 종이 1.운룡지   2. 장지   3. 화선지  4. 표백하지 않은 순지   5. 표백한 순지   6. 피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종이가 생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전주와 남원이 대표적인 생산지였다. 명나라 화가 동기창(董其昌)이 조선의 종이는 두껍고 질기며 희고 매끈하여 서예와 회화에 아주 적격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조선 종이의 품질은 우수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이는 문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매체뿐 아니라, 공예품, 생활 소품 등으로 활용범위를 확장하였다. 돈, 지갑, 창호지, 모자, 부채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면서 종이의 종류도 용도에 맞게 매우 다양해졌다.   조선은 1415(태종 15)년 종이를 만드는 관아인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여, 1882년까지 존속하면서 종이의 수요를 감당했다. 1420년에는 서울 세검정 에 조지서를 두어 여러 색지를 만들기도 했다.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Henri Zuber)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외규장각 의궤 를 보고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질 좋은 종이에 감탄하기도 했다. 조선은 학자들의 나라답게, 책을 많이 가진 나라였고, 그 만큼 많은 종이가 소비된 나라였다.    우리 종이의 쇠퇴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서양의 종이가 도입되면서 우리의 종이는 차츰 사양화되었다. 기계로 만든 서양 종이에 비해 우리 종이가 원료 공급 및 제작 과정에서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기가 우리 전통 기술과 문화 발전에 큰 장애가 된 탓도 있다. 현재 서양 종이는 다량의 출판 인쇄물, 복사용지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종이(한지)가 서양 종이처럼 널리 사용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종이 공예품과 고급 인쇄물 등의 용도로 다시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종이가 다시 널리 사용되는 시기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지천년(紙千年) 견오백(絹五百)’이라는 말이 있다. 즉, 비단의 수명은 오백 년을 가지만 한지의 수명은 천 년을 간다는 말이다. 천 년이 지나도 종이로서의 수명을 잃지 않는 한지의 내구성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천년을 가는 종이, 한지1966년 발견 당시, 오랜 산화작용으로 인하여 부식되고 일부가 훼손되기는 했으나 본문의 내용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보존상태가 우수했던 다라니경. 수명이 최대 100년인 오늘날의 종이에 비해 1,2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낸 우리 전통 한지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한지의 어원은 원래 닥나무 껍질을 가공하여 손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말로, 구한 말 일본을 통하여 기계로 만든 서양식 종이가 나오면서 그 이전의 종이를 한지(韓紙), 기계로 만든 서양의 종이를 양지(洋紙)라고 구분하여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외형이나 특징이 비슷한 개량 한지나 중국에서 수입된 종이들을 모두 한지라고 부르고 있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 전통 한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닥나무 껍질을 주원료로 하여 손으로 직접 떠서 만든 종이(수초지, 手抄紙)’라고 할 수 있다.    전통 한지는 무엇으로 만들까? 전통 한지를 만드는데 있어서 원료는 크게 주원료인 닥나무와 부원료인 황촉규액(닥풀)으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서 일명 참닥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 전 지역,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편마암이나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이루어진 토양에서 주로 자란다. 한지 재료로서 쓰이는 재료로서 참닥나무 이외에 삼지닥나무, 꾸지닥나무, 뽕나무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가운데 참닥나무가 섬유질이 매우 길고 질기기 때문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부원료인 황촉규(액)는 일명 ‘닥풀’이라고 하는데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 때 분산제로 사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황촉규 뿌리를 빻게 되면 누런색의 점액질이 나오는데 섬유가 지통에서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 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들의 결합을 도와준다. 또한, 첨가하는 닥풀의 양을 조절하면 발의 물 빠짐 속도를 변화시켜 종이의 두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닥풀은 종이에 뻣뻣한 강도를 높이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전통 한지 만들기전통 한지의 제조과정은 일반적으로 1) 닥 채취하기 → 2) 닥 찌기 → 3) 껍질 벗기기 → 4) 물에 담그기 → 5) 삶기 → 6) 씻기와 표백 → 7) 두드리기 → 8) 해리 → 9) 종이 뜨기 → 10) 물빼기 → 11) 말리기 → 12) 다듬기 → 13) 다리기의 13단계로 이루어진다.   참고문헌 및 관련자료 한치윤 저, 민족문화추진회 옮김, [(신편 국역) 해동역사(海東歷史)], 한국학술정보, 2008; 한국고대사회연구소, [강좌 한국고대사5- 문자생활과 역사서의 편찬],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저, 장연ㆍ김호림 옮김, [중국문명대시야] 1, 김영사, 2007;이용현, [한국목간 기초연구], 신서원, 2006; 국립중앙박물관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전시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1;황수영, [新羅 白紙墨書華嚴經], [미술자료] 24집, 국립중앙박물관, 1979;조선기술발전사편찬위원회, [조선기술발전사] 2, 3, 4, 5권,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6;H.쥐베르, CH.마르탱 저, 유소연 옮김, [프랑스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살림,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 의령군 봉수면 서득리 지촌한지

    봉수면 서득리 지촌한지 의령군 봉수면 한지의 유래가. 유래   지금부터 1000 여 년 전 고려시대. 경남 의령군 봉수면 소재 국사봉 중턱 '대동골'계곡에 대동사란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에는 설씨 주지스님이 있었는데 어느 봄날 산자락과 밭두렁에 지천으로 나 있는 야생 닥나무 가지를 꺾어 보았더니 껍질이 아주 질기다는 것을 알고, 개울 물속에 한나절 담가 두었다가 건져내보니 아주 부더러 우면서도 질긴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돌로 찧어서 너럭바위 위에 얇게 펴서 널어 말렸더니 빛깔도 곱게 바래어진 채 아주 질 좋은 닥종이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 일이 기원이 되어 이 곳을 비롯한 인근지역으로 전파되어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지역 유명 특산물이 되기에 이르렀으며, 가내수공업 형태의 한지 주산지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조정에 올리기도 했고 중국에까지 팔려 나가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곳이며 이런 연유로 해서 한동안 이곳 지명이 지촌면으로 불리기도 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한지의 생산도 기계화 기업화되면서 전통 수공업에 의한 닥종이 생산은 그 명맥을 잇기도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지만 우리고장의 자랑스러운 특산물일 뿐 아니라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발전을 위하여 계속 생산 보급하고 있는 이곳을 시범 문화마을로 지정 받음과 함께 전시관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 한지의 유래 A.D 105년, 중국 후한시대에 "채륜" 이 종이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한지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시대인 372년, 불교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낙랑고분" 에서 출토된 닥종이 뭉치 등으로 미루어, 우리의 종이 역사는 1500 ~ 1600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신라시대의 다라니로 751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종이는 대략 BC 2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며 1986년 감숙성 천수시 팡마탄에서 BC 179~141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종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종이는 마지로 품질이 매우 좋아서 그 이전에 이미 종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채륜이 어망과 마넝마 및 수피)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뒤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종이나 제지술이 전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의 접근방법을 통해 그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니혼쇼키〉에 3세기말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이로 된 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610년(영양왕 21)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종이·먹·채색·맷돌을 전할 때 종이와 함께 제지술도 전수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기록에 의해 우리나라에 종이가 들어온 하한시기와 당시 우리나라에 제지술의 존재여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둘째, 4세기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경과 함께 제지술도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사경을 많이 보시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평양 부근에서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채협총에서 칠통과 함께 종이뭉치가 출토되었고, 평양 대동강가에서 고구려시대의 〈묘법연화경〉이 발견되어 늦어도 2~7세기 사이에 매우 발전된 제지술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우리가 한지의 대명사로 쓰고 있는 '닥지'라는 말에서 종이의 전래시기를 살펴볼 수 있다. 닥은 한지의 주원료로 한자로 표기하면 '저'인데 중국에서는 BC 2세기부터 AD 2세기까지 닥으로 읽혀졌다. 그러므로 '저'가 닥이라고 읽혀졌던 시기에 우리나라에 종이 원료인 닥과 함께 제지술이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후 3, 4세기의 음가가 밝혀지지 않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4세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종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2~4세기에 종이와 제지술이 전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봉수면 서득리에서 생산되는 전통한지는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전통한지의 맥을 이어오고 있음.   진상품 관련이야기 봉수면 서득리에서 생산되는 전통한지는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전통한지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부터 1,000여년전 고려시대 국사봉(의령군 봉수면 소재)중턱 대동사란 큰절이 있었다. 이 절에는 설씨라는 성을 가진 주지 스님이 있었는데 어느 봄날 산자락과 밭두렁에 지천으로 나있는 야생 닥나무 가지를 꺾어 보았더니 껍질이 아주 질기다는 것을 알고 개울물 속에 한나절 담가 두었다가 건져내 보니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돌로 찧어서 너럭바위 위에 얇게 펴서 널어 말렸더니 빛깔도 곱게 바래어진 채 아주 질 좋은 닥종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조정에 올리기도 했고 중국에까지 팔려나가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종이고장이 되었고 이런 연유로 해서 한동안 이곳 지명이 지촌면으로 불리어 지기도 했음.   이와는 조금 다른 내용의 구전설화가 의령의 향우지인 『의령향우』에 정리되어있다. “1,000년 전 고려 때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에 국사봉 중턱에 약 20년 전까지 터가 있었다는 대동사의 주지 ‘설(薛)’씨가 어느 봄날 닥나무 껍질을 흐르는 냇물에 담가 두더니 껍질이 물에 풀리면서 삼베 올처럼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손으로 주물러서 바위 위에 건져 놓았더니 종이와 같은 물체가 만들어져, 이것을 계속하여 종이를 만들었다” 고 전해진다.     상품정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입니까’란 질문을 던지면 의외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방안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입니다’란 대답을 자주 듣는다. 가장 한국적인 멋을 잘 표현한 대답 중 하나다. 따사로운 햇살의 원천은 바로 천년을 간다는 우리 민족 전통 종이인 한지로 창과 문을 발랐기 때문이다. 닥나무 껍질을 재료로 해서 만든 한지(닥종이)는 흔히 창호지를 말한다. 백지선지. 피지. 황백지. 화선지. 장지. 색문지 등 다양하다. 입에다 대고 불면 바람이 통하지만. 한겨울 서릿바람을 막아내는 보온기능도 뛰어나다. 국내 닥나무는 중국산보다 섬유질이 질겨. 좋은 연을 만들 때는 한지를 써야 제격이다. 게다가 공예품. 장식품 등의 재료로도 다양하게 활용된다. 이런 한지의 최초 생산지가 의령군에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 하지만 지금의 한지는 값싼 양지와 중국지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고. 한지 생산과정과 기술을 잇기도 힘든 상황이다. 고향을 지키며 증조부 박경용옹 이후 4대째 박해수(64·봉수면 서암리)씨가 의령 한지의 맥을 잇다. 1950~60년대만 해도 한지는 귀한 것이었고. 만들면 팔려 나가는 우수한 상품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는 잔심부름을 하고. 13살 본격적으로 일을 배워 15살 때 직접 한지를 만들었다. 한지를 만든다는 것은 생계의 수단이었고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큰 의미는 없었다. 산과 들에서 닥나무를 베고. 껍질을 벗겨 종이를 만드는 일은 단지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이고. 그 곳에서 생산과정과 기술이 전해졌던 것이다. 당시 서암리에는 80% 이상이 한지를 만들었고 부림면 신반리에 신반4·9장(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한지를 팔러 나가기 바빴다고 한다. 군대를 갓 제대한 그는 전국의 닥종이를 모아 마을에 내려놓고. 봉수 한지를 전국에 내다파는 일을 할 정도였다고 했다. 한지가 시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펄프를 수입한 제지공장이 들어와 기계로 양지를 제작하면서 한지가 주눅 들기 시작했다. 종이 질로 치자면 한지를 따라올 수 없지만 가격 면에서는 양지가 경쟁이 되지 않았다. 공산품과 수공예품의 차이였다. 양지가 서서히 한지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한지를 만들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외지로 떠났다. 결국 서암리 80여 가구 중에 지금껏 한지를 만들고 있는 인근의 강상문(69)씨와 둘뿐이다. 그는 “간혹 어떻게 만드느냐고 전화로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직접 배우려고 오지는 않는다. 고 했다. 한지는 실습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생계를 이어지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창때는 500동(100만장) 정도를 혼자서 만들었는데 이제는 1년에 10동(2만장) 정도를 만들고 있다생산기술 맥 잇기 어려워 그는 “한지기술은 누가 이어도 이어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렵다.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도 부담이 된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지난 2000년 의령 한지의 도 무형문화재 지정이 추진된 적이 있다. 사라져 가는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지정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오고 있다. 당시에는 봉수 전통한지전승보존회가 이 같은 일을 추진했지만. 이제는 사람들도 떠나고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지 생산과정 ① 닥나무 채집 → ② 닥나무를 증기로 찜 → ③ 껍질을 벗기는 작업 → ④ 물에 담가 불린다(12시간 불린다) → ⑤ 겉껍질을 벗긴다. → ⑥ 잿물에 삶는다. → ⑦ 닥메로 두들긴다. → ⑧ 물통(보걸이틀)에 넣어 잿물을 빼낸다. → ⑨ 건져서 물기를 빼낸다. → ⑩ 표백통에 넣는다. → ⑪ 지통에 넣고 닥풀과 함께 혼합(풀개 작대기로 푼다) → ⑫ 발로 뜬다. → ⑬ 철판에 말린다. → ⑭ 완제품(창호지. 백선지. 피지 등 생산)   한지의 용도 한지는 현대와 같이 여러 가지 지식전달매체가 없던 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서사 재료였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서적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가장 중요한 용도 역시 전적이었다. 따라서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해지지 않는 두꺼운 종이가 좋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종이의 용도는 종이 연으로 에 그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 문헌을 보면 불경을 인출하기 위해 많은 종이가 필요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와 같이 각종 용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태종대에 중국에 보내는 자문지의 확보와 저화의 규격을 일정하게 하고, 원료의 확보와 제지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영 제지공장이자 관서인 조관지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책뿐만 아니라 각종 관공문서·창호·꽃·종이돈과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한지의 질긴 특성 때문에 부채·우산 등에도 많이 사용되어 중국의 호평을 받았으며, 부의지로도 중국에 많이 보내졌다. 조선시대 이후 벽지로도 사용했으며, 종이를 꼬아 생활용기나 장식품을 만들었는데 이를 지승공예라고 했다. 지승공예는 사대부들이 취미 삼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공예품은 미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그 형태도 바구니·가방·상·물병·지갑 등 다양하다. 오늘날에는 서화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며 특별한 풍취를 낸 서간지도 유통되고 있다. 질기고 부드러우며 탄력성과 번짐성이 있어서 판화지로도 적당하다. 더욱이 보존성이 뛰어나 작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뛰어난 재료이다. 한지는 기계지보다 우수하여 50배나 긴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지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관련근거 및 출처 : [傳統韓紙展示館] (두산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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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은한 전통의 아름다움 담은 전통한지 이야기

    한지는 닥나무 껍질과 닥풀을 삶아서 말리고 두드리고 체에 떠서 말리는 과정까지 무려 99번의 손을 거친답니다. 닥풀의 농도가 낮으면 종이를 뜰 때 물 빠짐이 빨라 두꺼운 한지가 만들어지고, 농도가 높으면 물 빠짐이 느려 얇은 종이가 만들어져요.  한지가 종이로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므로 총 100번의 손길을 거쳐 한지가 완성된다고 해요. 한지가 주는 은은한 멋과 우수성은 바로 이런 장인정신의 산물일 터인데요, 이정란 방송 작가님이 말하는 '한지' 이야기, 지금부터 함께 살펴볼까요?  새 창호지 바르던 날 유년 시절 한옥에서 살았던 저는 문살의 창호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정갈함이 가득한 하얀 종이, 한쪽 귀퉁이에 엇갈려 붙여 놓은 분홍빛 코스모스 두 장까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였죠. 매년 추석이 다가올 즈음이면 우리 집은 헌 창호지를 뜯어내고 새 창호지를 바르는 연례행사를 치렀어요. 그날이 되면 할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온 집 안의 방 문을 떼어다가 마당에 눕혀 놓으셨죠. 창호지에 맺히는 아침 이슬이 천연 분무기 역할을 한 것이다.  창호지에 물기가 어느 정도 스며들면 우리 사 남매는 고사리 손으로 창호지를 찢어댔습니다. 북북~ 박박~ 누렇 게 변색된 낡은 창호지가 하나둘씩 찢겨 나가는 소리가 꽤나 경쾌했습니다. 평소에는 찢어질까 봐 함부로 만지지 못 했던 창호지를 그날만큼 은 마음껏 찢을 수 있었죠.  문살에 착 달라붙은 창호지는 할머니가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뜯어내셨습니다. 헌 창호지가 다 제거되면 새창호지 를 풀에 발라 문살에 붙였어요. 이때 미리 준비해 놓은 코스모스 두 장을 창 호지 사이에 붙이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일. 새하얀 창호지로 갈아입은 문들이 제 위치로 돌아가면 온 집 안이 훤해졌고, 이로써 추석맞이 집 단장은 마무리되었죠.  한지로 도배해 볼까?   "유행을 타지 않고 은은한 멋이 느껴지는데다 이렇듯 늘 자연을 곁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놓이고 뿌듯하기까지 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때만 해도 한지와 삶은 떼려야 뗄 수 없었습니다. 아니, 한지와 함께 한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한지 장판지에서 태어나 한지 벽지로 둘러싸인 방에서 생활하고, 한지 서책으로 공부하며 한지 수의를 입고 죽음을 맞이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혼하여 양옥에 살다 보니, 또 주변 환경이 점점 양지 위주의 삶으로 바뀌다 보니 한지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쉬워하고만 있다가 문득 '도배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이사를 앞두고 있어 주저 없이 한지를 택했죠. 한지는 그 어떤 유해물도, 한 치의 화학약품도 첨가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의 재료로만 만드니 진정한 친환경 벽지가 아니던가요? 방온과 방풍 효과가 뛰어나 날씨가 건조할 때는 한지가 수분을 내뿜고 습할 때는 수분을 흡수하면서 자동으로 습도 조절까지 해주니 그 어떤 벽지가 이만할까요? 냄새 제거 기능 또한 탁월하여 주방과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온 현대식 가옥 구조에도 제격입니다. 인터넷으로 한지를 검색해 보니 초등학생 딸이 좋아하는 분홍색 한지는 물론 한지 속에 나뭇잎과 꽃잎이 들어있는 것까지 종류가 참 다양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도배를 하고 부푼 마음으로 첫날밤을 보냈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마주한 한지 벽지에 얼마나 마음이 평안해지던지. 도배지에서 진짜 풀잎이 떨어졌을 때는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유행을 타지 않고 은은한 멋이 느껴지는데다 이렇듯 늘 자연을 곁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놓이고 뿌듯하기까지 했죠.  은은한 멋과 매력   한지로 도배를 하고 나니 이젠 실생활에서도 한지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늘 마음에 걸렸던 유리로 된 거실장이 마침 눈에 띄었는데, 장난감을 담아 놓아 아무리 정리해도 늘 지저분해 보이던 곳이었죠.  대티 잎이 들어간 파란색 한지를 유리에 붙이니 금 세 깔끔하고 세련된 거실장으로 변신했습니다. 덕분에 가구와 벽지가 온통 하얀 실내에 포인트가 되어 주었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인테리어 효과를 본 셈이에요. 한지 한 장이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해요. 한 사무실의 세미나실 유리 벽면에 한지가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절로 미소가 지어졌어요. 한지를 반달 모양으로 잘라서 웃는 얼굴을 그려 놓았는데 자칫 무겁고 긴장될 수 있는 분위기가 이 한 장의 한지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센스가 참 반가웠죠.   최근에 저는 딸 덕에 ‘한지 등’의 매력에 빠져 지내고 있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딸이 학교에서 만들어 왔는데, 동그란 등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글씨와 함께 하트를 그려 넣고 색종이로 나비를 오려 붙였어요.  정성도 정성이지만 그 은은한 한지 등이 저는 참 마음에 들었어요. 등 위에 달린 작은 고리를 거실 등 아래 걸어 놓으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죠. 분위 기를 내고 싶은 밤이면 이 한지 등을 켜고 근사한 음악을 틀어놓아요. 그러면 평범했던 거실이 어느새 낭만적인 카페로 변신한답니다. 고작 얇은 종잇장 하나일 뿐이지만 한지가 전해주는 느낌과 그 다양한 쓰임새는 감히 양지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한지에 기름을 발라 비옷이나 우산을 만들어 사용하고, 아교를 두껍게 발라 갑옷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어요. 겨울옷에는 한지를 솜 대신 넣기도 했고, 스카프나 옷을 만들어 애용하기도 했죠. 지금은 다양한 옷감이 개발되어 등한시되고 있지만 저는 수의만큼은 꼭 한지를 고집하고 싶어요. 한지는 닥나무의 섬유질 때문에 단단하고 질긴데다 부드럽기까지 해 수의로도 적합하다고 해요.  자연의 재료로 만들었으니 흙과 함께 어우러져 100%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적어도 수의로 인해 이 땅을 오염시킬 일이 없으니 저세상 가는 길마저도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수의를 미리 준비하면 건강하게 오랜 산다고 하는데 이참에 한지 수의 만드는 법을 배워 보고 싶어요. 100세 시대에 인생의 5분의 2를 향해 가고 있으니 차근차근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올해 94세이신 할머니 것부터 준비하여 부모님 것과 내 것, 남편의 수의까지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만들다 보면 지금 생에 더 감사하며 살 뿐 아니라 행복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kyobolifeblog.co.kr/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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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왕절개수술은 어떤 상황에서 해야 하는지 과연 정상분만보다 안전한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최근 의료보험공단의...혀졌다. 제왕절개수술은 어떤 상황에서 해야 하는지 과연 정상분만보다 안전한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6년전쯤 인턴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겨울날 새벽에 임신 8개월의 임신부가 심한 하혈을 하여 쇼크상태로 쓰러져 응급실로 왔다. 시급한 응급처치를 하면서 태아의 심장박동은 정상임을 확인하였고, 수혈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과장님께 연락드렸다. 곧 바고 나오신 과장님께서 진찰하신 후 전치태반이니 빨리 수술준비를 하라고 열화같은 재촉이 대단하셨고, 허둥지둥 수술실과 마취과에 연락하고 필요한 수술전 검사와 준비를 마친 후 제왕절개수술을 시작할 때는 환자가 병원에 들어온지 1시간이 채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수술실에서 과장님의 귀신같은 수술솜씨에 탄복하면서, 아하, 태반이 자궁의 입구를 가로막아 정상분만이 불가능한 것이 바로 전치태반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옛날, 이런 수술을 못하던 시절에는 이 산모와 아기는 죽을 수밖에 없었겠구나라는 당연한 결론을 얻었다. 수술을 받은 산모와 아기는 그후 별탈 없이 건강하게 퇴원하였고 의사로서 뿌듯한 보람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이와 같이 제왕절개수술은 절박한 응급상황이거나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산모나 태아에게 중대한 위험이 예측될 때 시행되어야 함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제왕절개수술을 너무 남용하는 경향이 있으며(의료보험공단의 통계에 의하면 임신부5명중 1명 이상이 수술로 분만함), 정상분만이 가능한 임신부들조차 많은 수가 저마다의 이유에 따라 수술 분만을 하고 있다. 제왕절개수술이 많아지는 원인은 병원측(의사)과 환자측(임신부) 양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병원측으로서는 우선 가능한 의료사고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방어진료의 수단으로 수술을 이용하고 있으며, 게다가 정상분만에서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면서도 정상분만보다 훨씬 많은 영리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모들 중에도 고통없이 분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제왕절게수술을 해주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면 과연 정상분만보다 제왕절개수술이 더 안전한가? 우리나라보다 의료시설과 의료관리가 잘 발달되어 있고 철저한 방어적 진료를 하며 우리와 비슷한 비율로 제왕절개수술을 하는 미국에서 발표된 10년간에 걸친 한 통계를 살펴보면, 모성사망률(분만과 관계된 산모의 사망)은 정상분만에서는 10만명중 2.7명인 반면, 제왕절개분만에서는 10만 명중 30.9명으로 무려 11배에 달하고 있으며 그 사망원인으로는 과다한 출혈, 패혈증, 폐전색증, 마취사고 등이 중요한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분만후의 합병증이나 후유증들도 개복수술인 제왕절개수술에서 훨씬 많다. 예를 들면 요관이나 방광 등 비뇨기계통의 손상, 장의 손상, 혈관손상 및 출혈, 자궁 및 나팔관, 난소 등의 감염, 비뇨기계통의 감염, 마취 및 수혈로 인한 사고와 합병증 등이 나타날 수 있으며 정상분만을 한다면 이들 대부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제왕절개수술을 받은 산모는 입원기간이 길어지고 회복도 늦어지므로 출산비용이 많아지고 가사노동 또는 직장으로 복귀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가정경제 및 사회경제적인 손실도 많다. 이 기회에 보건행정당국은 의료기관에서 정상분만을 선호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주기 바라며 일반국민들에게 홍보하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불필요한 제왕절개수술은 정상분만보다 결코 안전하지 않다.  

  • 천년을 견디는 전통 한지, 내구성의 비밀은 닥나무!

    우리나라 고유의 기법으로 만든 전통한지. 비단의 수명은 오백 년이지만 한지는 천 년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내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지의 내구성은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51년에 출간된 책으로 1966년도 발견 당시 본문 내용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했습니다. 종이의 수명이 최대 100년인 것에 비하면 무려 10배 이상의 수명을 가진 것이죠. 1,200 여 년의 세월을 견뎌낼 정도로 우수함을 가진 전통한지는 우리나라의 고유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지는 닥나무껍질을 가공하여 손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습니다. 구한말 서양식 종이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전통 종이를 한지라고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죠. 한지의 주재료는 닥나무로 천 년의 세월을 견디게 해 주는 한지의 비밀은 바로 닥나무에 있습니다. 천 년의 수명을 가진 한지의 비밀, 닥나무는 어떤 나무일까요? 지금부터 닥나무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 관목으로 저상(楮桑)이라고 부릅니다. 영문명은 종이나무(Paper Mulberry)로 종이에 쓰이는 뽕나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닥나무는 나무 줄기를 꺾으면 딱! 하는 소리가 나 닥나무라고 불렀다고 추정하는데요. 한국, 일본, 중국 등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닥나무는 5월~6월 사이에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가 익습니다. 열매는 저실 또는 구수자라고 하여 약용으로 쓰이는데요. 본초강목에서는 닥나무 열매를 성질은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는 약재로, 힘줄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안색을 좋게 하며, 피부와 살을 충실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눈을 밝게 한다고 합니다. <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는 장용훈 한지장과 전통기법으로 만든 한지 / 사진: 문화재청> 한지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닥나무 껍질은 섬유의 굵기가 균일하며, 길이가 다른 나무보다 길고 강도가 높습니다. 전통과학기술조사 연구에 따르면 화학펄프의 재료인 전나무와 소나무 등 침엽수의 섬유 길이가 3mm인 것과 비교해 3배가 긴 10mm이고, 섬유조직은 그물처럼 촘촘해 충격에 강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한지를 겹겹이 붙여서 갑옷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닥나무는 햇볕이 잘 들고 기온이 높은 곳에서 잘 자랍니다. 또한 비가 자주 오고 습도가 높은 곳이 생육하기 좋은 최적지입니다. 토양은 배수가 좋은 양토와 식양토가 적당하죠.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산간의 경사지에서 재배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는 토사유실을 막기 위해 제방이나 밭둑 등에 심기도 했습니다. 단, 바람이 강한 곳은 피하고 방풍대책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육모법 닥나무는 결실이 불량하고 발아력이 낮아 실생번식보단 모수의 형실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 무선번식에 의한 증식방법이 많이 이용됩니다. 무선번식 방법에는 분근법, 삽목법, 휘묻이법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분근법이 많이 사용되나 휘묻이법이 가장 좋습니다. 분근법  닥나무의 새로운 뿌리는 부정형의 발생이 용이하므로 쪼개어 심으면 발근과 활착이 잘 됩니다. 3월 하순경에 그루를 파서 길이 15㎝, 지름 4㎜ 이상인 것을 심습니다. 묘상에 잘 썩은 퇴비를 1a당 약 100㎏을 토양과 잘 썩어 주고, 40㎝×10㎝의 간격으로 뿌리의 끝이 1㎝가량 땅 위로 나오도록 심습니다. 묘상의 건조를 막기 위해서 왕겨나 짚으로 피복하고 발아하면 묽은 액비를 사용합니다. 새싹이 나오면 1∼2본만 남기고 순 자르기를 해줍니다. 삽목법  닥나무의 삽목은 활착이 잘되지 않아 실용적으로 이용되지 않았으나, 발근제인 NAA의 효과가 인정되어 이를 이용한 육묘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겨울철에 삽수를 저장하기 전 삽수의 하부에 호르몬 처리를 하고, 이를 하천의 모래에 묻어 옥내에 두었다가 4∼5월경에 파내면 저장된 삽수가 거의 발근됩니다. 이를 40㎝×10㎝가량의 거리로 묘상에 심습니다. 겨울철에 삽수를 길이 30㎝로 자르되 하부는 45°의 각도로 합니다. 이를 하천 모래에 묻어 옥내에 두었다가 다음해 5월경에 꺼내어 삽수의 하부에 형성된 캘러스를 자르고, 0.1%의 NAA 20시간 침지하였다가 묘상에 이랑나비 40㎝에 포기사이 15㎝ 간격으로 심습니다 휘묻이법  휘묻이하기 위하여 남겨 둔 가지를 3월경에 땅에 닿도록 휘어서 고정시켜 놓으면 4월경에 이르러 가지의 눈에서 새싹이 틉니다. 새싹이 25㎝가량 자란 6월 중순경에 가지의 기부를 철사로 동여매고, 10㎝ 깊이로 복토한 후 가지의 선단을 자릅니다. 복토 후 10∼15일이 지나면 발근이 시작되는데 건조하지 않도록 잘 관리하고 8월경에 묽은 액비를 살포합다. 낙엽 후 파내어 1개씩 절단합니다. 회묻이법은 한 가지에서 10∼15본의 묘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육묘법입니다. <자료: 농촌진흥청>  묘목 식재는 이른 봄 잎이 피기 전에 실시하는데 3.3m(1평)당 6~8본을 식재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심을 구덩이 깊이와 넓이는 40cm 정도로 파고, 퇴비 7.5㎏, 요소 10g, 과인산석회 15g, 염화칼리 100g가량 넣고 흙과 잘 섞은 다음 줄기와 뿌리를 각각 15cm 길이로 자른 다음 식재합니다. 밭둑과 같은 유휴지에 식재할 경우는 식재 간격을 80~90cm정도로 약간 넓게 심는 것이 좋습니다. 보통 닥나무는 무비재배를 해도 되나 3~4월경에 10g당 질소, 인산, 칼리를 성분량으로 각각 7.0kg내외로 시비하면 좋습니다.  <한지 주원료로 사용되는 닥나무 / 사진: 국립수목원> 중경과 제초는 양자를 겸하여 3∼4월 발아 전 약 20일, 7월 중순의 장마기, 8월중의 성하기 등 3번 실시하는데 제초한 것을 바닥에 깔아 주어 토양의 건조와 유실을 막아 줘야 합니다. 맹아수가 많을 때에는 제아(除牙)하여 가지의 수를 조정해야 합니다. 또한 섬유채취의 효율을 높이고, 섬유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잔가지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하여 곁눈을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닥나무의 줄기 섬유는 2년 이상이 되면 거칠어지기 때문에 매년 줄기를 베어내 수확해야 합니다. 정식한 첫해부터 수확을 할 수 있고, 3~8년 간이 가장 좋은 섬유 수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확한 닥나무는 줄기 섬유는 천년 이상을 견뎌내는 한지로 탄생하게 되죠.   <박피상태의 닥나무 껍질 / 사진:문화재청> 닥나무는 한지 제조에 있어 중요한 재료여서 조선시대 때 많은 지방에 닥나무 밭을 경작하게 했을 정도입니다. 최근에도 전통 한지 전통성을 이어가기 위해 닥나무 재배단지를 조성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구한말 러시아 대장성의 조사보고서 ‘한국지’에서 “한국의 종이는 섬유를 빼어 만들므로 지질이 서양 종이처럼 유약하지 않고 어찌나 질긴지 노끈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우수성이 입증이 되었는데요. 세계가 우수성을 인정한 한지의 전통을 이어 나가도록 다같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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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한직업 한지 제작 한지장판 한지벽지 완주한지공장 생활한지제작 수제한지 한지만드는 과정

    백 번의&...nbsp;번의 손이 닿아야 탄생하는 한지! <생활 한지 제작> 오늘 극한직업에서는 한지의 탄생과정과 한지로 만들어지는 다양한 재품들을 소개한다. 한지의 특성 때문에 우리 실 생활에 여기저기에 사용을 하고 있다. 한지는 보온성과 통기성이 아주 뛰어난 종이다. 최근 한지를 이용한 친환경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곳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한지는 만드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탄생을 한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진다. 일반 종이를 만드는 과정보다 매우 까다롭다. 특히 일반 종이가 보급이 되면서 한지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랜 한지 연구 끝에 기계를 이용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기존의 한지 가격보다 더 저렴하고 다양한 한지를 생산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지는 벽지로 사용을 하거나 여러과정을 거쳐 한지 장판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한지장판은 사람의 손과 정성이 더 많이 들여야 하기 때문에 제작기간만 한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벽지 또한 시공 작업이 쉽지 않다. 친환경 소재인 만큼 접착제를 이용해서 벽에 시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풀을 이용해서 한장 한장 정교한 작업이 이루어진다. 오늘 힘든 작업이지만 한지를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극한직업에서는 완주에 있는 한지 공장을 찾았다. 이곳은 기계를 이용해서 한지를 대량으로 생사나을 하고 있는 곳으로 저렴한 한지를 만들고 있어 한지를 빠르게 보급하고 있는 곳이다. 한지 기계화는 15년 전부터 하고 있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있다. 한지를 기계로 뽑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우리 전통에 한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 낸 수제 한지를 찾는 것이다.수제 한지는 전용 도구 ‘발’을 좌우로 기울여서 종이의 표면을 형성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숙련공의 오랜 기술이 필요하다. 앞 물로 떠서 위로 흘려버리고 옆 물을 떠서 반대쪽으로  흘려버리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렇게 형성된 닥섬유의 표면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서로 얽혀 더 질기고 강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좋은 한지를 만들 수 있지만 한장을 만드릭 위해서 너무나 많은 시간과 정성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이곳에서 생산된 한지는 주로 벽지나 장판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 한지장판 기계로 빼는 한지를 먼저 합지 과정을 거친다. 합지는 얇은 종이를 여러 번 붙여서 두껍고 빳빳한 종이로 만드는 작업이다. 아침일찍 시작을 하는 작업에도 하루종일 500여장 뿐이 만들지 못한다. 이렇제 만들어진 합지는 햇빛 아래에서 건조를 한다. 그다음 기름을 먹이는 작업을 한다. 마지막으로 옻칠을 하면 되는데 옻작업은 작업을 하는 사람의 섬세한 감각으로 칠 하기 때문에 하루에 나오는 양은 너무나 적은 양이다. 낱장으로 붙여야 하기 때문에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작업을 해야 하는 힘든 작업이다.     ■ 한지벽지 한지벽지는 기존 벽에 있는 도배지와 접착제, 시멘트 돌멩이를 제고 하고 그 위에 다시 초배지를 바르고 난 뒤 작업을 할 수 있다. 한지벽지는 친환경 제품이기 때문에 시공을 할 때 접착제를 바르지 않고 친화경 풀을 이용해서 시공을 한다. 이처럼 친환경 인테리어 재품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한지. 한지장판과 한지벽지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새집증후군으로 고생을 하거나 아토피가 있는 집들은 한지장판과 한지벽지로 시공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에 전통 한지. 지금은 우리 곳곳에 쓰이고 있다. 오늘 질 좋은 한지를 만들고 안지를 이용해서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는 한지 만드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http://wisdoma.tistory.com/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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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한지문화제 2015

      ... 불구하고 종이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누런 종이가 바로 한지이다.   ‘한지는 천년, 비단은 오백년 동안 보존이 가능하다’는 지천년견오백이라는 옛말처럼 한지는 질기고 강한 특성 때문에 우리 민족의 강인하고 순결한 정신을 담았다 하여 백지(白紙)라고도 불리었으며, 99번의 손길을 거쳐 100번째 완성하였다고 하여 백지라고 불리 우기도 하다.우리 민족의 지혜와 멋이 담겨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인 한지의 세계로 안내하게 될 원주한지문화제는 한지의 제조과정과 역사, 한지의 다양한 쓰임새를 확인하는 한지와 생활, 한지의 무한한 예술세계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전시와 국제종이예술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국제전시를 함께 볼 수 있다.   또한 해외 종이작가들의 작업과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행사, 한지 뜨기와 한지공예 등 다양한 체험행사, 한지로 즐기는 놀이체험, 가을밤의 정취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야간 공연 등의 행사로 구성되어 있는 문화와 교육적 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신나고 재미있는 축제이다.     행사내용 특별행사 : 한지패션쇼전시행사 : 기획전시, 한지역사실, 대한민국한지대전 수상작 전시체험행사 : 오색한지뜨기 체험, 한지생활소품체험, 한지전통공예체험, 닥종이 만들기 등공연행사 : 개막공연, 앙상블 콘서트, 오케스트라, 프린지페스티벌 등그 외 학술행사 및 경연대회 진행 부대행사 아트벼룩시장한지느림보우체통한지소원지쓰기종기접기놀이먹거리마당 등     행사기간 2015.09.10 ~ 2015.09.13 위치 강원도 원주시 한지공원길 151 (무실동) 행사장소 원주 한지테마파크 일원 연 락 처 033-734-4739  

  • 원주한지문화제 2016

      ... 불구하고 종이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누런 종이가 바로 한지이다. ‘한지는 천년, 비단은 오백년 동안 보존이 가능하다’는 지천년견오백이라는 옛말처럼 한지는 질기고 강한 특성 때문에 우리 민족의 강인하고 순결한 정신을 담았다 하여 백지(白紙)라고도 불리었으며, 99번의 손길을 거쳐 100번째 완성하였다고 하여 백지라고 불리 우기도 하다.우리 민족의 지혜와 멋이 담겨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인 한지의 세계로 안내하게 될 원주한지문화제는 한지의 제조과정과 역사, 한지의 다양한 쓰임새를 확인하는 한지와 생활, 한지의 무한한 예술세계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전시와 국제종이예술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국제전시를 함께 볼 수 있다. 또한 해외 종이작가들의 작업과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행사, 한지 뜨기와 한지공예 등 다양한 체험행사, 한지로 즐기는 놀이체험, 가을밤의 정취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야간 공연 등의 행사로 구성되어 있는 문화와 교육적 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신나고 재미있는 축제이다. 행사내용특별행사 : 한지패션쇼전시행사 : 기획전시, 한지역사실, 대한민국한지대전 수상작 전시체험행사 : 오색한지뜨기 체험, 한지생활소품체험, 한지전통공예체험, 닥종이 만들기 등공연행사 : 개막공연, 앙상블 콘서트, 오케스트라, 프린지페스티벌 등그 외 학술행사 및 경연대회 진행 부대행사아트벼룩시장한지느림보우체통한지소원지쓰기종기접기놀이먹거리마당 등   행사기간 2016.09.29 ~ 2016.10.02 위치 강원도 원주시 한지공원길 151 (무실동) 행사장소 원주 한지테마파크 일원 연 락 처 033-734-4739 홈페이지 http://www.wonjuhanji.co.kr 홈페이지 http://www.hanjipark.com

  • 원주한지문화제2019

        "천년의 숨결-한지, 세계로! 미래로!"   원주한지문화제는 수제한지의 본고장 원주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한지문화축제이다.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하며 한지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오감만족 축제이다.   시작일 2019.05.02. - 2019.05.06 전화번호 033-734-4739 홈페이지 http://www.wonjuhanji.co.kr 주소강원도 원주시 한지공원길 151 주최사단법인 한지개발원 주관원주한지문화제위원회 이용요금유료/무료  

  • 전주한지문화축제2019

        <전주한지문화축제>는 천년전주 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전통한지공예의 경진대회를 통하여 전국의 우수공예인을 발굴하는 한편, 전주한지 공예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또한 지역문화축제에서 벗어난 대한민국 한(韓)스타일의 중심에서 한(韓)스타일을 대표하고 글로벌 축제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는 한바탕 어울림 축제이다.   2018년 <전주한지문화축제>는 5월 5일부터 7일까지 한국전통문화전당, 한지산업지원센터에서 개최된다. 축제기간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한지인과 비한지인, 어른과 어린이, 여자와 남자, 한국인과 외국인, 주민과 시민등 모든 계층의 사람을 디"한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어울리도록 기획하였다. 또한 전주 국제영화제나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 그리고 전주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고장을 알리고, 전주 한지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행사내용] - 개막식, 각종공연, 한지놀이, 체험관, 산업관, 공예체험, 전주한지공예대전 수상작전시, 이벤트   시작일 2019.05.04. - 2019.05.06 전화번호한지문화축제조직위원회 063-271-2503 홈페이지http://www.jhanji.or.kr 주소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현무1길 20 주최전주시 주관전주한지문화축제 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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