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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춤, 승전무 칼춤과 북춤
15-03-29 11:14

우리 춤, 승전무
신라시대(660년경)동자들이 가면을 쓰고 양손에 칼을 쥐고 추던 춤이 있었으며, 신라의 어린 화랑이었던 황창랑이 백제 궁에서 검무를 추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통영지방의 칼춤은 임진왜란 때 북춤과 더불어 삼도수군통제영 산하의 취고수청, 교방청 등에서 지방색 짙은 통영칼춤으로 변형, 발전되어 고종말기에 칼자루와 칼을 고리로 연결하여 돌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위험성이 없고 연희성이 높은 검기로 변형되어진 것이다.
통영북춤은 고려충렬왕 때의 무고舞鼓로부터 발달하여 조선말엽까지 내려 온 궁중무고형의 정수와 전통을 이어 받은 춤으로 북을 뉘어 놓고 춤꾼 넷이 북을 두드리며 추는 춤인데 통영만이 간직한 독특한 향토춤이다. 《악학궤범》의 무고 기록은 《고려사》 ‘악지’에 표기 된 것처럼 2인이 한 개의 북을 둘러싸고 추는 춤부터 4인이 4개의 북, 또는 8인이 8개의 북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무고는 사신을 위로하는 잔치나 회례연, 진연 및 종친 형제간의 잔치 등에 폭넓게 사용 되었고 통영에서의 북춤과 칼춤은 임진왜란 시 통제사가 싸움터나 병선 위에서 장졸들의 사기를 돋우고 망중한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 혹은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춤을 추게 하였다. 또한 삼도수군통제사의 영문에서 하례시와 군점 등의 행사나 충무공의 춘추향사와 탄신제에서 헌무하던 것이 승전무로 완성되었다.
고려, 조선조를 거쳐 장구한 세월을 지나 전승된, 교방계열의 성격을 지닌 전통적인 춤이며 통영지방에서 오랜 세월 추어지면서 춤사위와 더불어 음악, 무구, 복색등의 변화를 가져왔고 향토자생적인 힘과 문화의 바탕위에서 완전한 민속춤으로 정착되어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춤이다.




승전무에 흐르는 다양한 요소들
승전무에서는 궁중정재 음악을 쓰지 않고 민간제례악인 통영삼현육각을 바탕으로 연주가 된다. 또한 조선 초기 반주 음악은 느린 음악으로부터 점점 빨라지는데 반해 승전무 반주 음악은 염불도드리와 느린 타령, 잦은 타령으로 빨라지다가 염불도드리와 굿거리로 마무리되는 특징을 보이며 북춤에 나오는 ‘창사는 달아 높이 고이 돋을 사’(달노래) ‘어기야 어기 어기 여차’(뱃노래) ‘우리 충무장군 덕택이요’(충무공노래)‘낙지자 오날이야’, ‘지화 지화 지화자 지화허자 지화자’등으로 통영색이 짙게 배어있는 가사로 되어 있다.
통영칼춤의 춤사위는 입춤, 사위춤, 손춤, 외칼춤, 쌍칼춤, 연풍대의 순으로 이루어지며, 칼은 중앙이나 다른 지방의 칼과 달리 칼자루와 칼이 분해되어 칼 목이 돌아가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이것은 통영에 12공방이 있어 장석을 만들었던 장인들에 의해 검무의 칼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북춤 의상은 일반 백성들이 입는 청(동),백(서),적(남),흑(북),의 두루마기 형태의 복식을 입었고 북어름사위, 어깨울러멘 사위, 머리위돌림사위, 삼진삼퇴, 돌려치는 사위 등의 춤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발굴 전 악사들의 의상은 흰 두건과 흰바지 저고리, 흰 두루마기의 평민복을 입었으나 현재는 궁중무 악사의 형태로 바뀌어져 있다. 이러한 승전무는 이충무공의 유서 깊은 사적과 결부되어 장구한 기간 동안 면면히 전승되어 오다 1896년에 군대가 혁파되면서 단절되었다가 70여년 후인 1966년에 발굴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멋 그리고 아름다운 미
한국전통예술의 특징은 산이 하나로 보이지만 산봉우리마다 독자성을 지니며 각 마루마다 보이지 않는 질서를 가지고 있는 연산구조에 있다. 이처럼 승전무의 북춤과 칼춤은 따로 떼어내도 독자적으로 춤이 완성되어 있고 하나로 합쳐도 승전무라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춤이 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데 문화재 지정 전에는 교방춤으로서, 지역 주민들과 어우러진 향토적인 춤으로, 군점행사 시에는 행사를 마치거나 행사 중간에 입춤 형식으로 추기도 하였던 춤이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후 많은 변화가 시도 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승전무의 탄생으로 보다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추구하고자 하는 무용인들의 미의식이 반영된 결과물로 원래 4인이었던 무용수가 8인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무용수들의 신체조건이 작고 아담한 체격이어서 그 체격에 맞는 작은 크기의 북을 사용하였으나 북이 커지면서 화려해졌고, 문양이 없던 의상들도 학 문양을 넣으면서 화려하게 치장되고, 예술성과 기교성이 발달되어 그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승전무는 사회적 기능에 의해 그 미적 특성 또한 달라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사당에서 지내는 제의적인 의례용으로 춤을 출 때는 그 엄숙함이 우선이었으며, 전쟁터에 나가기 전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추는 독전용일 때는 용감성과 드높은 기상과 기백을 춤 속에 담아내었을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연희할 때는 기쁨과 사기충전의 미를 보여주었을 것이며, 연례용이나 연희를 위해 추었을 때는 편안하면서도 잔치분위기의 맛을 한껏 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능에 의해 미적인 변화는 생겼지만 승전무가 가지는 경쾌한 중량감의 전통성과 한국 전통춤의 맛인 곱고 관능적이며 장엄한 우아함의 멋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런가 하면 통영 토속정서의 넉넉함으로, 섬세하고 절제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높은 예술적 수준의 승화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통영칼춤을 살펴보면 민중문화를 창조하는 민속검무로서 세련미와 표현성을 가미한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웅장한 느낌을 주는 칼놀림은 정교하고 동작이 섬세하여 조심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특히 겨드랑사위에서의 손과 몸동작은 물결을 따라 움직이는 병선에서의 노 젓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통영칼춤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 중의 하나인 진격태는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몸짓과는 대조적으로 장졸들의 사기를 돕고 전쟁에서 승리를 노래하기 위해서 추었던 흔적들로 칼을 든 무사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위엄 있게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북춤에서 중앙에 놓은 북은 구병법에 의한 모든 지휘 호령신호가 북을 울려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텅 빈 공간 속에 놓인 북은 무용수들의 호흡과 정지한 듯 품어져 나오는 힘의 충만으로 인해 온 세상을 채울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우주를 떠받드는 강렬한 기운으로 모든 이의 공유공간으로 울려 퍼진다. 한국적인 미의 특성인 태극선묘인 휘어진 선, 부드러운 직선의 미적 세계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고 밖으로는 남성, 안으로는 여성의 중성성으로 기념비적 숭고함, 전쟁비애의 애상과 비장한 애잔함을 감추고 있어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성을 지니며 무게 있고 우아함이 그대로 표출되는 춤사위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승전무는 향토적 특색이 짙은 민속춤으로, 우리춤을 연구하는데 더 없이 좋은 춤으로 각광을 받을만한 가치를 지니며, 한국적이고 자연적인 멋과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향의 도시, 통영
통영은 한반도의 최남단 한려수도의 기점이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다. 통영은 기후가 따뜻하고 천혜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청정해역을 자랑하는 수산 관광자원의 보고寶庫이다. 사철 푸른 바다와 만선의 고깃배들이 넘나드는 남녘의 고즈넉한 항구도시다. 잘 알려지지 않는 작은 갯촌 이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세계해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승전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고 1604년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오고부터 하루가 다르게 도시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며 모든 분야에서 변화를 가져와 통영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시대의 물줄기가 바뀌는 개화기에도 풍부한 예술성과 진취적인 통영기질은 신문화를 앞장서서 받아 들였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에서 활약하던 문화예술인들이 통영으로 피란을 와 통영의 예술인들과 교류를 하여 통영의 예술은 전쟁 중임에도 오히려 활발히 움직여 많은 문인, 음악가, 화가 및 조각가, 극작가, 연출가, 무용가를 배출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저력의 바탕 위에 통제영 소속의 관기가 추었던 승전무는 통영의 민속무로 자리를 잡았고 통영 교방청에 적을 두었던 김해근은 이국희와 정순남등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정순남은 엄옥자와 한정자에게 그 맥을 이어 1968년 승전무라는 명칭으로 통영북춤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 받았고 1986년 통영칼춤이 추가로 지정되면서 북춤과 합설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통영은 통제영시대 영하에 12공방을 두고 각종 공예품을 생산하였으며 교방청과 취고수청에서는 예능인과 악사를 양성하여 연희하였다. 그 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나전장, 소목장, 두석장, 입자장, 승전무, 통영오광대, 남해별신굿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전되어 오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글·사진 | 엄옥자 국립부산국악원 예술 감독, 승전무 예능보유자
사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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