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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은 신하, 생강은 임금이 먹었을 만큼 귀한 식품
14-12-21 12:23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고려는 북방 거란으로부터 자주 침략을 당했다. 급기야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현종이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전남 나주까지 피란 가는 상황도 벌어졌다.

 거란과의 전투가 잦다 보니 북방 전선에서 전사자도 많이 생겼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국가에서 보상해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당연하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현종 9년인 1018년 8월에 임금이 교시를 내려 전사자에 대한 보상을 지시한다.

 “을묘년(1015) 이래 북방 전선에서 전사한 장수와 병사의 부모·처자식에게 계급에 따라 차와 생강, 베를 하사하라(賜茶, 薑, 布物).”

 전사 장병에 대한 대접이 겨우 생강과 차, 베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혹시 장병들의 목숨값을 너무 가볍게 여겼기에 국경 방비가 소홀해져 외적으로부터 침략당했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반대였다. 보상으로 내린 생강과 차, 베가 어느 정도 값어치였는지 정확하게 수치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기대 이상의 수준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세 물품의 가치를 따져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장수나 전공이 큰 전사자에게 지급된 하사품은 아마 생강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생강이 주로 김치를 담글 때, 혹은 요리할 때 들어가는 양념에 지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생강은 엄청나게 귀한 향신료였고 양념이라기보다는 주로 약재로 사용됐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삼보다도 생강을 더 귀하게 여겼다. 불과 124년 전의 기록인 고종 27년의 승정원일기에서도 생강에 대한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해 손님맞이 연회상이 차려졌는데 전례에 따라 임금의 다례상에는 연한 생강차, 사신의 다례상에는 인삼차가 올랐다. 영조 때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임금이 사돈이자 원로 대신인 홍봉한에게 차를 대접하는데 승지가 인삼차를 올리겠다고 하니 영조가 인삼차 대신 생강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임금이 마시는 차와 사신, 신하가 마시는 차의 격식을 달리했던 것이니 생강차가 인삼차보다 한 단계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생강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인식은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초에 가깝다. 생강에는 따뜻한 기운인 양기가 가득 차 있어 정력에도 좋고, 물에 담갔다가 말려 먹으면 묘한 작용을 해서 풍증이 사라지고 위와 장이 편해지며, 달여 먹으면 관절통도 거뜬해져 부축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역대 조선 왕의 치적을 모아 기록한 책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이다. 여기에 인종이 제12대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취임 선물로 신하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고 나온다. 그러면서 “생강 먹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하늘과 통하기 위한 것이고, 더럽고 나쁜 것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여러 군자가 언제나 공자를 사모해 작은 음식도 모범으로 삼도록 생강을 하사하니 서로 전하여 그 뜻을 새기도록 하라”고 말한다.

 공자가 생강을 즐겨 먹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논어에 “식사를 할 때 생강을 빼놓으면 안 되는데 많이 먹지는 않는다”고 했다. 공자의 이 말에 주자(朱子)가 주석을 달았는데 생강은 신명(神明)과 통하는 음식으로 더럽고 불결한 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식사할 때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해석을 한 것이다. 공자에 더해서 주자까지 이렇게 해석을 했으니 유교를 받들었던 조선의 군주와 양반들은 생강을 고귀함과 강직, 정결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이다.

 사실 생강을 하늘과 통하는 식품으로 여겼던 것은 아랍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슬람의 코란에는 알라가 천국의 축제에서 생강을 제공한다고 했다.

 “알라가 말씀하시기를 생강을 넣은 음료수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며…” “뜨거운 생강 음료수가 담긴 잔을 받은 자” “알라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선 자는 언제든지 그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등등. 이슬람에서 생강은 하늘과 통하는 식품이고, 생강차는 천국의 음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강을 귀하게 여겼을까? 생강은 열대성 작물로 재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현종이 1018년 8월, 전몰장병에게 차와 생강과 베를 하사했다는 것은 그만큼 장병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1018년 12월,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이때 재침공을 예상하고 20만의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가 거란에 맞섰다. 거란군은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는데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사람은 불과 2000명이었다.

 귀주대첩은 유비무환의 자세와 강감찬 장군의 전략 덕분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전투에 나가 싸우다 죽어도 나라가 책임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용감해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사기의 명언처럼 고려사에 나오는 단 한 줄, 북방 전선에서 전사한 장졸의 부모 처자에게 차와 생강, 베를 하사한다는 한마디가 귀주대첩의 기본 바탕일지도 모른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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