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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역사인물 중에 누가 암행어사였을까요?
15-09-19 14:46
 
  • 이황(李滉, 1501~1570)
  •  
    조선시대 이름난 학자였던 퇴계 이황도 암행어사였어요. 이황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숙부 밑에서 자랐어요. 1534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를 지냈고 나중에는 대제학에까지 이르렀어요. 또한 이황은 청렴 결백하여 재물이라고는 방안의 책밖에 없는 검소하고 고결한 삶을 산 청백리였어요. 이황은 대궐에 드나들 때를 빼고는 늘 베로 지은 옷에 칡으로 엮은 신을 신고 대지팡이를 짚고 다녔어요.

    어느 날 좌의정 권철이 이황의 집을 방문해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어요. 그런데 상에 오른 것은 거친 나물 반찬 뿐이었어요. 호사스러운 생활에 길이 든 권철은 숟가락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고 돌아와서 그의 검소한 생활에 혀를 내둘렀다고 해요.

    이황은 시문을 잘 짓고 글도 잘 썼으며, 겸허한 성격을 지닌 대학자로 크게 존경을 받았어요. 오늘날도 그의 학문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어요. 지은 책으로는 <퇴계집>, <성학십도> 등이 유명해요.
  •  
  • 박문수(朴文秀, 1691~1756)
  •  
  • 암행어사 하면 역시 박문수가 아닌가요? 박문수는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에 이르렀으나 당파싸움 때문에 벼슬을 빼앗겼어요.
    1727년 영조가 당파싸움을 물리치면서 영남 지방의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탐관오리를 벌주고 백성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었어요. 박문수는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어요. 또 어영대장·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당파싸움이 심하던 당시에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할 것을 주장했어요.

    함경도 진휼사(흉년에 어려운 백성을 돕기 위해 파견되는 관리)로 나갔을 때는 경상도에서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굶주린 백성을 구했어요. 백성들은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함흥의 만세교 옆에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어요. 박문수는 군사와 세금에 대한 업무에 특히 밝아 당시 나라의 개혁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어요 .

    호조 판서로 있을 때는 궁궐에서 쓰는 경비가 엄청난 것을 알고, 궁궐 경비 지출의 항목과 한도를 정한 <탁지정례>를 만들어 경비를 함부로 쓰지 못하게 했어요.
    박문수의 암행어사 시절의 활약상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요즘 여러분이 알고 있는 수많은 "박문수 설화"가 만들어졌어요.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  
    <목민심서>를 지은 유명한 실학자 정약용도 암행어사였다는 것은 알고 있나요?
    정약용은 178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에게 무리한 세금을 물리고 뇌물을 받은 탐관오리들을 왕에게 보고하여 처벌하도록 했어요.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참의까지 올랐으나 신유박해 (1801년 즉 신유년에 일어났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사건)로 전남 강진에서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어요.

    정약용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학문에 힘써 훌륭한 책을 많이 썼어요.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 수령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목민심서>,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에 관하여 자세히 밝혀놓은 <경세유표>, 죄인을 다스리는 형벌에 관한 내용을 다룬 <흠흠신서> 등도 이때 지은 책들이에요. 정약용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서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고 책을 쓰는 데만 힘썼어요.

    정약용은 500권이 넘는 책을 지었는데, 임업에 관한 <산림경제>, 종두법에 관한 <마과회통> 등도 유명해요. 정약용은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목표로 삼았어요. 그래서 백성들에게 불편과 부담을 주는 제도는 과감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늘 주장했어요. 또한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높아 수원성을 설계하고 수원성을 지을 때 도르래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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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최고의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도 암행어사였어요.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충청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어요.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으며, 특히 붓글씨에도 뛰어났어요. 그래서 당시 이름난 실학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어요. 24세가 되던 해인 1809년, 청나라 사신의 일행이 된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당시 중국 최고의 학자였던 옹방강, 완원 등을 만나게 되었어요 .

    그래서 옹방강에게는 글씨와 그림, 금석학(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고대의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을 배우고, 완원에게는 실학을 깊이 배웠어요. 조선에 돌아온 김정희는 금석 학 연구에 힘써 그때까지 무학대사의 비로 알고 있던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내고, 그 비문의 내용을 정확히 해석했어요. 김정희는 1840년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귀양을 가서 9년을 보냈고, 돌아온 지 3년 뒤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서 이듬해에 풀려났어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에는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어요.

    김정희는 실학자답게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학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붓글씨에 독특한 개성을 살려 "추사체"를 만들었어요. 책으로는 <완당집>이 유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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