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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칸 부자집 밖 '호지집'엔 사병이 살았다?
15-09-12 19:46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 김동수 가옥. 호남 부농의 상징인 이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해수로 따지면 230년이 되었지만, 이 가옥은 아직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우리 고택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청하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정읍의 젖줄인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동수 가옥의 특징은 대문채인 바깥사랑채, 사랑채와 중문채, 그리고 안채와 아녀자들이 외부의 여인네들과 만나서 담소를 즐기는 안사랑채가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담 밖으로는 노비들이 묵는 '호지집'이라고 하는 집이 여덟 채가 집 주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중 두 채만 남아있다.
 
 
김동수 가옥을 둘러보면 참으로 대단한 가옥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장을 둘러 그 안에 건물을 지었다. 한 채의 가옥이 이렇게 넓게 자리를 한 집은 많지가 않은 점도 이 집안 부의 내력을 알만하다.
 
'호지집'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김동수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밖에 자리한 호지집이다. 솟을대문을 약간 비켜서 한 채가 있고, 담 밖 전후좌우에 모두 여덟 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두 채만 남아있다. 호지집이란 말은 생소하다. 김동수 가옥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고택을 답사했지만, 호지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호지집은 노비들이 기거를 하던 집이라고 한다. '호지(護持)'란 수호하고 지켜낸다는 소리다. 이 호지집을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설명을 하기에는 적당치가 않다. 단순히 노비였다면 무엇 때문에 전후좌우에 두 채씩 배분을 해서 지었을까?
 

  
김동수 가옥의 담장 밖에 있는 여덟채의 호지집은 노비집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비가 아닌 사병이 묵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아마 생각해보건 데 이 김동수 가옥의 규모로 보아 지역의 부농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많은 곳간과 헛간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 많은 양의 곡식과 재물이 있는 김동수 가옥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집을 짓고, 집을 수호하는 역할을 준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노비집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호지가(護持家)>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 호지집에 묵는 노비들은 일을 하기 위한 노비이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경계의 업무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호지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실 노비가 아닌, 노비로 가장한 김동수 가옥을 지키는 사병(私兵)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는 전국에서 단연 으뜸
 
김동수 가옥은 행랑채라고 부르지 않고 대문채, 혹은 바깥사랑채라고 부른다. 행랑채에도 많은 손님들이 묵었다는 설명이다. 주인을 찾아오는 외부의 손님을 행랑채에 묵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바깥사랑채 혹은 대문채라 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솟을대문 좌우에 담을 쌓아 건물로 사용을 했으며, 담장에 나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좌, 우측에 곳간과 마굿간 방, 대청 등이 자리한다. 곳간의 넓이로 보아서도 이 집의 부(富)가 상상이 간다. 대문채를 들어서 우측에 마굿간 등이 있으며 꺾인 북쪽에 있는 칸에도 방을 두 칸 두고 있다.
 
  
대문채의 동편부분이다. 마굿간과 방 들로 꾸며져 있다. 행랑채라고 하지 않고 바깥사랑채라고 부른다.
 
이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야 말로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건물 중 단연 최고이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一자형 평면이다. 높은 기둥에 세워 방은 두 칸과 뒷방 한 칸을 꾸몄다. 부엌과 안창고라 불리는 내고(內庫)가 있는 외는 전부를 마루로 만들었는데 보기에도 시원한 양청으로 꾸며 멋을 더했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만든 장대석의 기단 위에 올려놓은 사랑채는, 김동수 가옥이 얼마나 집을 짓는데 있어 방위와 멋을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전국에서 보이는 많은 고택 중, 김동수 가옥의 사랑채를 단연 으뜸으로 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김동수 가옥의 사랑채는 고택의 사랑채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 사랑채에는 재미난 점이 하나가 있다. 바로 사랑채에 붙은 방이다. 사랑채의 방은 ㄴ자 형태로 3칸의 규모이다. 이 세 칸 중 앞에서 보이는 2칸은 어른이 사용을 하였고, 뒷방 한 칸을 아들이 사용하였다. 뒤쪽 방을 아들이 사용한 까닭은 안채의 며느리가 사용하는 건넌방과 동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동선이 사당 쪽에 담장을 낀 좁은 통로로 이어진다. 이 길을 지나면 건넌방의 뒤편이 나오는데, 툇마루를 놓아 뒷문으로 방을 드나들 수가 있다. 집안사람들의 눈을 피해 젊은이들이 정담을 나눌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 김동수 가옥의 최고의 멋이란 생각이다.
 
마주한 안채와 중문채의 비밀
 
김동수 가옥의 특징은 집들이 서로 마주하고 앉았다는 점이다. 대문채와 사랑채가 마주하고, 중문채와 안채가 마주한다. 중문채는 모두 11칸으로 지어졌으며 양편을 꺾어 날개채를 달아냈다. 이 중문채는 집안의 여자하인들과 어린자녀의 공부방, 안변소와 곳간 등으로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특징은 사랑채와 대문채도 그러하지만, 중문채와 안채도 방이 서로 마주하지를 않는다.
 
대문채와 중문채의 방을 놓는데 있어, 조금은 비켜서 방을 놓았거나 꺾인 부분에 방을 들여 놓았다. 중문채는 안 변소, 헛간, 곳간에 이어 내외벽이 있는 두 칸의 중문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헛간과 곳간이 계속되다가 아홉 칸 째에서 꺾이어 북쪽으로 부엌과 방이 두 칸 이어진다.
 
  
집안 곳곳을 담장으로 막고 일각문을 내어 통행을 하도록 하였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길게 ㅡ자로 늘어선 중문채의 중문을 지나야만 한다.
왜 이렇게 방을 놓는데 있어 주인과 하인의 방을 마주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마 두 가지의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 하나는 주인의 신분이 하인과 마주 할 수 없이 높다는 뜻일 테고, 또 하나는 밑에 사람들이 마주하면 불편할 것을 감안해 조금 비켜나도록 방을 들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문채와 마주하는 안채는 집안의 여주인이 거주하는 것이다. 이 안채는 ㄷ자형으로 지어졌는데 양편 꺾인 부분에 부엌을 달아낸 독특한 방법을 썼다. 안채는 가운데 6칸을 대청으로 조성을 하였다. 이 안채 역시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김동수 가옥의 중요 건물 중 하나로 그 멋을 더했다. 대청의 양 끝에 방을 두고 대청의 뒤로는 큰 문을 내어, 뒤뜰의 경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멋스러움을 지닌 안채. 양편 날개채에 부엌을 들인 독특한 형태이다.
출가한 딸이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에 오면 이곳에서 몸을 풀기도 하고, 찾아온 여인들이 묵기도 했다.
김동수 가옥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한 안사랑채다. 사랑채는 주로 남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지만, 이 안사랑채는 안주인을 찾아오는 여인들이 하루 유숙을 하기도 했지만, 출가한 딸이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에 오면 이곳에서 몸을 풀었다고 한다. 결국 사랑채보다도 더 안채를 중시한 가풍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안사랑채는 입향조인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그 자신과 목수들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남향으로 지어진 이 안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5칸, 측면 한 칸 반이 되는 규모로 지어졌다.
 
  
담장 안에 있는 집들 중 유일한 초가집인 외측
한 때는 가을에 수확한 벼가 1200섬이 넘었다고 하는, 부농의 상징인 김동수 가옥. 2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원형 그대로를 유지한 채 지켜낸 집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건물과 건물을 담으로 막고,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도운 김동수 가옥. 99칸의 대부호의 집답게 여기저기 둘러볼 것이 많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난 동선을 따라 이동을 하면서 괜히 혼자 가슴을 설레 본다. 그 곳에 기다리는 여인이 있지도 않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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