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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당, 정말 대단한 집일세. 왕후가 두 분이나 살다니
15-09-12 15:15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하기는 했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쓴 것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대문의 안편
 
머슴들의 생활을 엿보다
 
감고당을 들어가는 문 입구에는 영조의 친필인 감고당 편액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은 중앙과 우측에는 문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문이 있을 자리에는 방이 들어섰다. 누가 문이라도 열어달라고 하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솟을대문의 양편으로는 길게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머슴 등 일꾼들이 작업을 하는 곳이다. 새끼를 꼬기도 하고 가마니를 짜기도 한다.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도 이용을 하는데. 감고당을 둘러보다가 만나는 하인들의 모습이 재미 있다. 
 

머슴들이 주로 기거를 하는 곳이다. 농한기면 가마니를 짜기도 하고, 새끼를 꼬기도 한다

행랑채 방에서 새끼를 꼬는 머습의 모습이 재미있다

행랑채 방 중에서 곳간으로 사용되는 방에서 볏가마를 진 머슴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사랑채
 
행랑채의 앞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다. 이곳은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시를 쓰고 정치를 논하기도 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랏일을 걱정하고는 했을 것이다. 감고당의 사랑채는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분이 되어 있다. 사대부가의 집이라고는 해도 정취가 있게 지어진 집이다. 
 

감고당의 사랑채는 누마루, 대청, 사랑방으로 구분된다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비켜서면 중문채가 있다. 중문채는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곳이다. 중문채의 입구에는 중문이라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문 안편으로는 안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칸막이를 하였다. 이 중문채에 달린 방에는 집안에서 일을 하는 청지기 등이 기거를 하는 곳이다. 또한 김칫독을 저장하는 저장소나 곳간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중문채를 들어서면 안채다. 안채는 여자들의 공간으로 사랑채와는 담을 사이에 둔다. 감고당의 안채는 집안에서 가장 안편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외부와는 차단되었다.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이곳 안채는 명성황후와 인현황후가 기거를 했던 곳이다.
 

집안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며 외부와 차단이 된다

사랑채와 담을 경계로 한 안채
 
두 분의 황후가 기거를 했다는 감고당.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듯 하다. 찬찬히 훑어본 감고당은 역사의 아픔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그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다. 소용돌이치는 역사를 이제는 다 잊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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